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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가 주는 의문문



문학을 입에 담거나 문자로 서술하는 이들에게 문학이 무엇이냐, 詩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한다면 선뜻 문학을 가지고는 답변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문학은 어떠한 삶의 형태나 역사, 학문의 개념을 뛰어넘어 허구를 겻들이되 철학(진리)을 담아내고 표현화 해 내는 양식이라고 나름의 지론을 펼칠 것입니다 그러나 시는? 이 의문문에 대해서는 좀체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루는 자의 주,객관의 입장으로 정립한 것을 두루두루 진술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시는 운율의 모방이라했고 또 어느 괴변가는 시는 이성을 상실한자의 언어적 주술이다라고 했으며 이는 곧 흥분의 도가니요 술이요 마약이요 등등, 무수한 자기 어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詩는 다른 학문과 달리 철저히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자기 감추기일수도 있겠습니다 적나라한 드러내기로 설득하고 인정받는 서술형태의 또다른 종류의 문학은 詩 하고는 엄연히 다른 맛입니다 정신에 의한 고도의 문자코멘트가 시 라한다면 詩는 분석과 이해를 떠나 묘미와 애매성에 기준을 두어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 정답을 구하려 애쓴다거나 이를 위한 과정에 공식을 투약하는 정신의 강요는 해서는 안 될 일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애매성(詩)이란 심장과 가슴을 가공하여 만든 언어의 출구라 일컫고 싶습니다 그것은 독자나 작가 자신이 어떠한 삶의 양식을 먹거나 씹어서 삼켰을 때 잠자고 있는 영혼의 뿌리를 뒤흔드는 일 일것입니다



2)감각의 기교화


그렇다면 우리는 본능에 의해서 창출되는 일상의 감각들을 좀 더 기교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에는 엣세이라는 품목이 있지요 얼핏 작가의 삶과 상식을 그대로 방출한것 같지만 문자로 배열된 문장안에는 분명 그가 전달코저 하는 메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만의 언어로 전달되는 논리의 기교이며 문학으로 가는 도전과 승부인 것입니다 하물며 시는 에세이보다 한층 농축된 철학을 주관과 객관의 심상을 겻들여 드러내고저 함인데 언어로서의 테크닉을 무시할 수 는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독자의 기분을 살리고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 시는 단순히 먼지같은 언어로 흥을 돋구지는 않습니다 독자란 작가에게 너무나 광범위한 물질입니다 물질의 성질은 단순히 관전만 하고 잡아당겨 자기것으로 흡수하려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자무의식은 작가의 오만이고 시에서 이러한 오만과 무례함은 얼마든지 허용범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를 긴장시키고 다시 말해서,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것을 위한 작업에 충실했을 때 독자의 본질에도 가 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에서 설득과 공감은 철저히 내것이야 하고 곧 독자는 서서히 내면을 열고 나를 들어 앉히기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강요를 한단 말입니까 절대 읽는이를 의식하지 마십시요 그건 위에서도 말했듯 철저하게 살아냈거나 경험했던 삶의 희노애락을 감각으로 익혀 보는 것입니다 다만 기교는 얼마든지 시에서 허락하고 있으므로 언어로서의 맛을 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독자의 감동과 공감은 나 살아내기가 솔직했을 때 인간본능으로서 공유되는 무아의식 자의식입니다 언어는 같이 치루는 무질서속의 질서이지요



3)무의식속의 의식화


시대는 변화합니다 개성도 중요하지만 때에 따라 유행을 무실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는 곧 사회화를 이루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의 개념이고 살아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詩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에 와서 영랑이나 소월을 주구장창 애창하는 변두리 애창가들이 있겠지만 현대시가 추구하는 문화의 습성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행위예술은 때때로 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고향의 정서나 남녀간의 정조관념에 애를 태우는 발상에서 우리는 진작에 전환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멸은 다시 생성의 모티브를 제공했으므로 그들이 심어놓은 정신의 문화를 결코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심리도 정신도 모두 변화된 삶의 구조속에서 토론되는 한 측면입니다 어느누구도 시인의 시를 읽어주지 않고 팽개쳐 진다 해서 시인은 시를 접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시는 어찌보면 문학의 잠재의식일 것입니다 표현의 범람속에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존재의 비밀을 털어 놓고야 마는 모든 생의 본질의 형상화이고 이를 되돌리면 시인의 직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는 그래서 더 더 비굴하거나 비정하지도 않습니다 앓아내는 삶의 위기가 깊고 넓어질수록 고도의 처절한 언어가 탄생하게 될 것이고 영랑이나 미당처럼 서정을 부르짖고 순수하기만을 고집하던 시를 복잡한 구조속에 이빨을 맞물리고 사는 현대시는 단연 이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터득한 문장기술은 삶의 단순범위를 잘라내고“시인은 각자 자기 재능에 따라 진정을 토로할 것이며 갈고 다듬은 흔적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이규보의 철학을 답습해야 할 것입니다 갈고 다듬은 흔적이 없어야 한다의 역설을 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곧 진정의 토로란 그야말로 진정이었느냐라는 자기검증을 지적하는 것이겠지요


4)詩의 전문성



詩를 만들기 위하여 언어를 채집하고 이를 조직해서 문제화 시키는것이 시인의 역량입니다 좀더 구체성을 띄고 들어간다면 일반적인 현상의 것들을 언어로 불러와 비틀기의 수단으로서 문맥화 하는데, 이러한 동작은 감각의 직,간접적 반응이 어떻게 효과를 내느냐에 따라 그 맛은 차별됩니다 언급 했듯이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더 심상의 촉각을 열어 대상을 만지고 느끼니 그가 본질이상으로 보입니다 늘 우리은 설명적인 어휘들 때문에 삶의 긴장도가 떨어지기도 해요 느슨하다는건 그만큼 헐겁다 와 같은 풀어짐과 해체를 일컫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시는 글이되는 것이고 다시 말로서 현상으로서만이 간주됩니다 시인의 시는 전문성을 추구합니다 이는 시의 자존심이자 시가 갖는 요소에 의한 획기적 예술이기 때입니다 詩다운 시란 시인(누구나 추구할 수 있습니다)만이 획득 할 수 있는 이들의 고유물이고 전유물이란 것입니다 어째서 독자와 작가의 수준이 같을 수 있습니까 이는 곧 시를 만드는 자와 이를 사용하는 자의 차별화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누구나 시인일 수 있습니다 시인이라고 기준하는 대열에 당신의 문제가 얼마만큼 뿌리로서 튼실하게 버텨 낼 것이냐는 것이지요 이것은 시가 추구하는 전문화에 길들임을 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시인을 대접할 권리가 있으며 똑같이 나눠갖고 흥분하는 것은 모두 다 대중이고 관객이란 것입니다 시를 쓰려거든 철저하게 전문화 하십시요 詩다운 시를 써야 합니다 감동과 감흥은 생활입니다 이러한 생활이란 모티브를 가지고 인생과 철학을 제대로 설정하려는 행위가 바로 詩가 하는 작업입니다 감동보다는 안도감을, 공감보다는 희망을 담는 기포제로서 시는 다분히 심상을 언어적, 사고적으로 표현하는 주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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