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특강
<문학상 무엇이 문제인가> / 임보
현재 한국문단의 구성원은 기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한 세기에 불과한 짧은 우리의 현대문학사에 비추어 본다면 결코 적지 않은 인원이다.
한편 현재 시행되고 있는 문학상의 종류도 기백에 달한다고 한다.
문단인의 비율로 따져보더라도 적지 않은 수효다.
문학상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문학과 문학인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가 그만큼 크다는 뜻도 되리라.
대부분의 세상사가 그렇듯이 상 역시 적은 것보다는 많은 편이 바람직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상이란 무엇인가?
물론 잘한 사람들을 드러내 기리는 일이다.
그러나 시상(施賞)의 궁극적인 의의는 과거에 대한 평가보다는 미래를 향한 기대에 두어진다.
잘한 이들은 더욱 잘하도록 격려하고 못한 자들도 다음엔 잘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자는 데 그 의도가 있다.
한국의 그 많은 문학상들이 우리 문단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수작들을 생산케 하는 데 기여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대부분의 문학상들이 상의 근본적인 취지와는 사뭇 달리 시행되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유감스럽다.
첫째로 상을 운영하는 주최 측에 문제가 없지 않다.
어떤 잡지사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상을 만들어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잡지사들은 이미 유명한 작가들만을 골라 상을 안겨주고, 수상작과 후보작들을 묶은 작품집을 만들어 장사를 한다.
그러니 이런 상의 심사 대상은 작품이 아니라 지명도를 지닌 작가들이 된다.
어떤 무명작가가 어떤 괄목할 만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어떤 상은 어떤 특정 집단들이 장악 관리하여 자기 집단의 구성원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수상자의 한정된 범위를 설정하고 만들어진 상들도 있기는 하다.
어느 지역의 주민이나 어떤 학교의 동문들만을 상대로 한 경우는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라 범 문단적인 성격을 띤 상인데도 애초에 그 상을 만든 이의 뜻과는 달리 특정한 무리들이 그 상의 운영권을 장악하여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둘째로 상을 받으려는 무리들 역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으리라.
그러나 상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라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
만일 그럴 자격도 없는 자가 상을 받는다면 이는 영예는커녕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상도 권위를 잃게 되고 사람도 망신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마저 갖추지 못한 무자격자들이 상을 타기 위해서 갖가지 로비 활동을 벌인다고 한다.
묻혀있는 훌륭한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수상운동을 전개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가 상에만 눈이 어두워 쫓아다닌다면 이 얼마나 측은한 일인가.
심지어는 상금도 반납하고 수상식장의 연회비까지도 부담하면서까지 상을 받겠다는 자도 있다는 소문이다.
마치 수상자 선정이 경쟁 입찰에서 낙찰자를 결정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 되고 말았다.
조선조 말기에 돈으로 벼슬을 샀던 무리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이러한 풍토에 맞서서 드물기는 하지만 수상을 거부하는 양심적인 작가가 없는 바도 아니다.
셋째로 수상자를 심사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적지 않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거의 고정되어 있다시피 한다.
심지어는 한 사람이 몇 신문사의 심사를 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유명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무리 작품을 보는 눈이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의 식견은 그만큼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양심적인 심사위원이라면 응모된 작품들이 다양한 견해들에 의해 보다 공평히 심사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집중된 심사 기회를 다른 이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보일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양보는커녕 심사위원 되는 것이 마치 무슨 벼슬자리 누리는 영예로 생각하는지 그 자리를 쟁취하려고 전전긍긍하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니 이 얼마나 추악한 작태란 말인가.
어떤 신문사가 주관하는 상 가운데는 심사위원이 아예 종신제로 고정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심사위원들에게 책임을 지워 공정한 심사가 되도록 하자는 것인가.
중간 중간에 지상을 통해 후보작들을 발표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특정인들의 권위 속에 상을 위축시키고 말 것이 뻔하다.
이는 ‘종신심사위원’이라는 명칭의 괴이한 상을 하나 더 만들어 몇 작가(심사위원)들에게 씌워주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혹시 사립 예술원을 신설하여 작가들을 장악하려는 저의를 지닌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심사위원들도 인간이니까 심사 대상자들 가운데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러나 심사는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름만 걸고 주최 측에서 내정해 놓은 사람을 추인해 주는 무기력한 심사위원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 문단의 연장자에게 예우를 하려는 도의적(?)인 심사위원도 있다.
그러나 심사는 인정이나 연민에 끌리지 않고 냉정해야 한다. 모든 상의 성패는 결국 공평무사한 심사에 달려 있기 마련이다.
상의 종류와 이름들도 허다하다.
대개의 문예지들은 신인상이라는 제도를 두어 경쟁적으로 문인들을 양산해 내고 있고,
많은 문학단체와 기관들이 갖가지 명칭의 상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문학사에 자취를 남긴 유명한 시인․작가들의 이름은 상의 명칭으로 팔리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선인들의 이름을 매단 상들이 혹 그들을 욕되게 한다면 저 세상에서라도 얼마나 통탄해 할 것인가 생각하면 참 민망스럽기도 하다.
상과 인연이 없는 많은 시인과 작가들이여, 상에 너무 연연해 할 것이 없다.
어차피 이 시대의 상이 공정성을 잃은 것이라면 그대의 수상 경력은 결코 그대를 영예롭게 할 것이 못되지 않는가.
그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후세의 어느 현명한 비평가가 이 시대의 문학을 엄밀히 진단할 때에,
상을 타지 못한 불행한 그대들에게 ‘무상(無賞)’의 월계관을 씌워 축복해 주리라.
만일 그대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 이 지상에 남겨두기만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