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학과 시


#시론 2

[시로 쓴 시론 시 감상]


종이상자 시론(詩論) / 함민복

종이상자가 납작하게 접혀 있다

종이상자는 겸손하다

물건을 담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이상자에도 글씨가 있다

글씨가 내용이 되지 않고

내용물을 대변한다

주로 질 낮은 종이로 만든다지만

파도 모양 골판지로 음양의 힘을 깨치며

중심에 어깨 맞댄 비움의 뼈대를 촘촘히 채운다

종이상자는

나란히 연대하고

차곡차곡 공간을 절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담아내는

시(詩)가 더 깊은 시라면

종이상자는

과묵한 시집이다

나무처럼 우직한 시인이다


—《창작과 비평》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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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우울氏의 一日』『자본주의의 약속』『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말랑말랑한 힘』『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등.


(감상)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있다.

함민복 시인의 시 종이상자시론이 바로 이 속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접혀 있는 종이상자에서 비움을 배우고 자신을 낮추는 이미지로 그려내고 이 종이 상자에 채우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채워주기에 시의 역할과 같은 행태로 바라 보고 있다.


하여 이러한 종이 상자야 말로 진정한 시집이나 다름없고 이러한 종이상자처럼 시를 짓는 시인 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고 이런 시인은 시의 정도 만을 걷는 우직한 시인이라고 종이상자를 시집과 시인으로 형상화 시킴과 동시에 시란 이렇듯 사악(邪惡)함이 없어야 하고 시인은 사무사(思無邪)의 정신으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는 시론을 시속에 담고있다. (이근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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