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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설날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 김종해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 시집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1990)




¤ 시인ㆍ출판인 김종해


-- 1941년, 부산 출생

-- 1962년, 국학대학 국문과 졸업

--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詩 <저녁> 당선

--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詩 부문에

詩 <내란(內亂)> 당선 / 등단

-- 《현대시》, 《신년대》 동인 활동

-- 1979년~ , [문학세계사] 대표



• 시집으로,


-- 첫 시집 [인간의 악기] (1966) 이후 최근에 발간한

[늦저녁의 버스킹] (2019)에 이르기까지 총 12권의

시집을 상재하였슴.






[ 詩가 있는 아침 ]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 중앙일보 2000.02.07




아들의 설빔을 지어주느라

어머니는 섣달 그믐밤을

꼬박 새우셨다.


이불 속에서 몇 밤 남았는가

손을 꼽으며 기다려온 설날은

나이가 들어서도 오히려

더 아름다운 '어머니의 나라' 가 된다.


김종해는 이렇게 설날이면

하늘까지 달래서 눈을 내려주고

천만명이 민족 대이동을 하는

고속도로를 넘지 않고도 우리들을

고향으로, 어머니 곁으로 데려다 준다.


포르릉 포르릉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구덕산 둥지로 세배가는

애기까치의 꿈이 눈발 속에 곱다.




이근배 /시인





#김종해 시의 답시


설날과 어머니/ 이현우


이른 새벽, 흰 밀가루가 흐르는 도마 위에서 따뜻한 손은 작은 달을 빚어냈다.눈발 속을 가르며 찾아온 설날은 세월을 이겨낸 뜨거운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힘들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 겨울의 하얀 산맥이셨다.


내 어린 날의 설날은 고무신에 담긴 먼지와 바람의 냄새였다. 아랫목에서 솟아오르는 아궁이의 불꽃, 그 위에서 어머니는 국자를 휘저으며 우리의 꿈을 따뜻하게 데우셨다.


포근한 옷자락에 스며든 간밤의 눈 내림처럼 나는 설빔을 입고 새벽 길을 달렸다. 뒷동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있었다.


설날은 그렇게 어머니의 나라였다. 뜨거운 떡국 한 그릇에서 우리의 시간은 다시 시작되었고, 어머니의 미소는 겨울 나무에 매화꽃처럼 피어나곤 했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중년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설날의 풍경이다. 하얀 눈 속에 묻어둔 기억들은 어머니의 온기 속에서 다시 한 번 살아난다.


소복하게 나리는 눈발처럼 설날이 오면 나는 어머니의 나라를 떠올린다. 달빛이 쌓이고 밤새 소쿠리 가득한 정성으로 빚어주신 편안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천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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