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도시는 브리즈번 2022년 8월
처음 3주 동안은 호스텔에서 머물렀다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세계였다
영어로 먼저 말 거는 건 익숙한 편이었지만, 처음엔 나도 모르게 쭈뼛거리게 됐다
낯선 환경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몸이 먼저 긴장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동생 덕분에, 포크리프트 자격증을 따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국에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인데, 여기선 꽤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첫날 수업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자동차 전용도로 옆길을 혼자 걷게 됐고
“이게 맞나?” 싶었던 그 순간,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려서 그냥 도로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나는 원래 새로운 것에 약한 사람인데 첫날 학원 가는 길조차 쉽지 않았고
이런데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날, 호주 아저씨들의 진짜 영어를 처음 접했고
한국에서 운전을 하지 않았던 나는, 실기시험이 너무 두려웠다
피하고 싶었지만 이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 버텨야만 했다
그날, 호주에서 처음으로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했고
밤이 되면 호스텔 복도로 나와 콧물을 닦아가며 암기를 했다 (하필 감기도 걸려서는)
학창 시절에 이렇게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지만, 뭐 지금이라도 하니까 됐다...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때의 나는 진짜 열심히 했다 ㅋㅋ
운 좋게도 자격증을 딴 지 2–3주쯤 지나서 브리즈번 공항 근처의 웨어하우스에 취직했다
교통편이 너무 불편해서 매번 택시를 타야 했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문제는 포크리프트 운전이 너무 자신 없었다는 것. (당연하지)
결국 며칠 만에 지게차운전직에서 일반 직원으로 강등됐다 하하
그리고 그 타이밍에,
그동안 안 걸리던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그 말인즉슨 겨우 구한 일을 놓치게 된 것.. 너무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호주 정부에서 코로나 지원금이 나왔고, 그 돈으로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계약직도 아니고, 원어민도 아닌 '그저 외국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며칠 뒤, 다른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질문도 많고 대면 인터뷰도 있었지만, 운 좋게도 다시 기회를 잡았다
이번엔 교통편도 좀 더 나았고, 나도 전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회사는 주로 광산이나 에너지 산업에 필요한 자재들을 파푸아뉴기니 같은 해외 현장으로 보내는 국제 운송 업무를 했다 나는 창고팀에 있었지만 단순한 육체노동만 하는 건 아니었다
GLMS라는 시스템으로 세금계산서를 정리하고,
RF 스캐너를 이용해 물건을 확인하고 포장하거나 재고를 관리했다
운송 방식이 항공인지 해상인지 구분해서 정리하는 것도 내 일이었고,
회사에서 지게차 트레이닝도 받아 조금씩 직접 운전하기도 했다
처음엔 뭐가 뭔지 몰라 정신없었지만, 하루하루 적응해 가면서 내가 다루는 일의 흐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내가 직접 지게차로 1톤짜리 물건을 옆 창고로 옮겼던 날. 그때의 떨림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빠뻘 되는 호주 아저씨들 사이에서 여성, 그리고 동양인으로 혼자 일하는 건 분명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자 연장을 위해 회사를 떠나야 할 무렵엔
아저씨들의 시답잖은 농담마저도 왠지 그리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만큼, 나 역시 이 팀의 일부가 되었다는 걸 느꼈다
호주에서 처음으로 ‘진짜 소속감’을 느꼈고, 그 찡한 감정과 고마움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분위기가 좋은 팀이었고, 아저씨들 덕분에 호주살이의 긴장을 조금은 놓을 수 있었다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그리고 정말 많이 배웠다
익숙해질 무렵 나는 투잡을 뛰고 있었다
낮에는 웨어하우스로, 퇴근 후엔 일식 덮밥집으로 출근
기차가 늦어 지각할 때도 있었지만 함께 일하던 팀원들이 좋아서 버틸 수 있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때가 떠오른다
다들 잘 지내죠?!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