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아이는 어디에나 있다

통대, 동기, 그리고 돌아이

by 구선생
돌아이는 어디에나 있다.
만약 내가 속한 집단에 돌아이가 없다면
내가 돌아이일 가능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돌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많이 듣게 되는 격언(?) 같은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햇수에 비해 돌아이를 그렇게 많이 만난 편은 아니다. 하지만 통대 입시를 목표로 학원을 다니는 동안 돌아이에 가까운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났다.



첫 번째, 음침한 뒷자리 남자

입시 학원을 다닐 때 항상 뒷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30대 남자가 있었다. 어딘가 어두운 표정에 음침한 아우라를 풍기며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셔도 못 한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럴 거면 학원을 왜 오나 싶었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한 기회로 그 남자를 포함해 다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허름한 식당 한켠에 놓여 있던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채팅으로 만난 여성의 사진만 보고 반했다며 여성의 집까지 찾아간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같이 밥을 먹던 여자 동기들은 얼굴을 찌푸렸고 자리에는 불쾌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때 구석에서 조용히 밥을 먹던 그 남자가 들릴 듯 말 듯 던진 말.


“얼마나 예뻤으면 집까지 쫓아갈까…...”


남들은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가까이 있던 나는 그의 한 마디를 똑똑히 들었고 그 뒤로는 더 이상 그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두 번째, 메소드 연기자

학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몇 살 위의 언니였는데, 지금은 언니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으니 그냥 ‘그 사람’이라고 부르겠다. 처음에는 입시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고 서로 먹을 것도 챙겨주면서 친하게 지냈다. 나에게 잘해주니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 사람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을 위해 학원을 잠시 쉬다가 다시 복귀했을 때, 나와 친했던 학원 동기들은 그 사람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뒤였다.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그들 사이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으니 한 동기가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하루는 내가 너무 아파서 수업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선생님이 내가 쓴 에세이를 칭찬하신 거야. 나는 수업 끝나고 아파서 바로 가려고 했는데 그 언니가 나를 붙잡더니 내가 쓴 에세이를 보여 달라더라. 나는 아프기도 하고, 나를 하나도 걱정하지 않는 언니가 얄밉기도 해서 ‘나 아파.’라고 에둘러 거절했지. 그런데 그 언니는 아랑곳 않고 ‘아, 정말? 그런데 네 에세이 좀 보여줄 수 있어?’라고 하더라. 그 다음부터 그 언니랑은 말도 안 섞어.’


원래 승부욕이 강하고 누구보다 잘 하고 싶어하는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걱정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 밖에도 본인 성적만 챙기는 자잘한 일화들을 많이 들었지만,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어쨌든 그 사람은 그런 성격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학원 사람들과 척을 지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갔을 뿐, 내가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서 특별한 악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이듬해 나는 학원에 복귀했고 그 사람도 재수를 하게 되어 예전처럼 학원을 함께 다니게 되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의욕이 넘쳤고 선생님의 손발 노릇을 했다. 선생님이 좋아하면 같이 좋아하고, 싫어하면 같이 싫어했다. 다시 말해 비공식 반장 같은 역할이었다. 좋게 말하면 적극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사람과 그럭저럭 잘 지냈다. 하지만 5월이 되면서 사건이 터졌다.


선생님이 다른 학원으로 이적을 하신 것이다. 그 바람에 학생들도 선생님을 따라 다른 학원으로 대거 이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새로 오신 선생님이 제시하신 커리큘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다니던 학원에 그대로 남았다. 비록 1년 넘게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선생님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 나의 합격 여부였다. 하지만 반장 격이었던 그 사람은 나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서로 다른 학원에 다니면서도 우연찮게 길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때마다 ‘굉장히 반갑지 않지만 애써 반가운 척 해야 하는’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나를 대했다. 그 사람의 그런 표정을 보고 난 뒤 무안해진 나는 그 다음부터 길거리에서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듬해, 그 사람은 통대에 합격했고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일 년 간의 재수 생활 끝에 나는 그 사람과 같은 학교에 한 기수 아래의 후배로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가 같아서 마주치기 싫어도 우연히 마주칠 때가 왕왕 있었다. 나는 한때 친했던 언니였기 때문에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허리를 굽혀 인사할 때마다 쌩 하고 지나쳐버렸다. 사람이 워낙 많을 때는 나를 못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지만 누가 봐도 나를 봤던 상황에서도 그냥 지나치니 나를 일부러 못 본 척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보다 조금 일찍 등교해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계단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그 때,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그 사람이었다. 나는 ‘이번에 인사를 해도 무시당하겠지?’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그 사람이 누구보다도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나를 보는 그 표정이 너무나 밝아서 이 계단에 나 말고 누군가가 더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계단에는 나와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 동안 내 인사를 무시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는 척을 하는가. 게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것도 영 수상쩍었다. 그 사람을 지나치고 다음 층으로 향하려는 순간, 계단 아래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인사를 그런 식으로 받아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내 쪽이었다.


“제가 인사해도 모른척하셨잖아요.”

“내가 언제요? 그건 진짜로 못 본 거죠.”


펄쩍 뛰면서 말하는 통해 나까지 정말로 속을 뻔했다. 하지만 그 동안 몇 번이나 인사를 했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인사를 했는데 그걸 못 보고 지나쳤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하지만 내 눈 앞의 이 사람은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한동안 봤다, 못 봤다를 가지고 의미 없는 실랑이를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그 사람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듯 말했다.


“그럼,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뭐라고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가던 길을 갔다. 그러자 내 뒤통수에 대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하고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학원 동기에게 이 사건에 대해 말하니 ‘역시는 역시다’라면서 소름끼쳐했다. 동기들이나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나를 모른 척 하다가 계단에 나와 둘만 남으니 본성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화가 나서 씩씩거리던 나였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말과 행동은 도대체 진실인가, 거짓인가? 그 사람은 정말 나를 못 봤던 것일까, 아니면 모른 척했던 것일까? 그 사람은 그 동안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람은 가스라이팅에 특화된 인재였던 것 같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표정 연기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의 기억을 조작하려 드는 사람. 지금도 그 천연덕스러운 표정 연기를 생각하면 조금 오싹해진다. 대학 졸업 때문에 가까이 지내지 못했던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통대의 돌아이들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된다.





이미지 출처:http://blog.daum.net/pinkblood3/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