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돌아이는 어디에나 있다(2)

통대, 동기, 그리고 돌아이

by 구선생

세 번째, 사자후의 아이콘

통대에 입학한 뒤 매주 한 번씩 주제특강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매주 다른 연사를 초빙해서 그들의 분야에 대한 강연을 듣는 것인데, 연사에 따라 그날 수업이 질문의 장이 되기도, 수면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수업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출석 체크를 하고 수업 리뷰도 꼼꼼하게 썼다.


사건은 어느 화창한 봄날에 터졌다. 모 신문사에서 나온 기자의 강연을 듣고 있을 때였는데, 하필이면 그 연사의 정치적 성향이 대다수 학생들의 정치 성향과 맞지 않았다. 말하자면 연사는 영 좋지 못한 곳을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강연을 듣고 있었고,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연사는 신나게 강연을 이어갔다. 그의 발언 수위는 점점 세졌고 나는 강당의 아슬아슬한 분위기와 춘곤증으로 인한 졸음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난감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자신만만한 연사는 이제는 품에서 A4용지를 꺼내더니 그것을 열정적으로 읽고 있었다. 그의 거침없는 발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 순간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강당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남학생이 쩌렁쩌렁한 사자후를 내질렀다. 꾸벅꾸벅 졸던 나는 그만 잠이 저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그는 갓 취사를 마친 전기밥솥처럼 씩씩거리며 연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아니, 이미 폭발했나?) 분위기 속에서 숨을 죽인 채 그와 연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연사는 노련했다. 자신의 강연을 갑자기 불쑥 뚫고 들어온 남학생의 존재는 그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한 듯했다. 그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숨을 돌리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연을 이어나갔다. 남학생은 연사와의 한 바탕 난상토론을 기대했다가 김이 빠졌는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레이저가 발사되고 있었다.


강연이 끝난 뒤 남학생은 통대생들 사이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너도나도 그 남학생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바람에 그의 소문은 통대생들 뿐만 아니라 통대를 준비 중인 입시생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졌다. ‘아, 그 주제특강 때 소리지르셨다는 분?’ 하면 누구나 알 정도였다. 아무리 연사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게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됐다는 의견이 있었던 반면 나이가 훨씬 많은 연사 앞에서 사자후를 지르는 그의 용맹함을 높이 사는 의견도 있었다. 어쨌든 그의 사자후는 나의 통대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그의 활약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 다함께 춘계 학술대회(사실상 엠티)를 갔을 때의 일이다. 모든 프로그램이 끝난 뒤 학과 별로 방에 모여 술을 마시고 게임을 했다. 나는 자정만 지나면 꾸벅꾸벅 조는 타입이기 때문에 술도 마시지 않고 바로 잠이 들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실에서 시끌벅적하게 술게임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잠과 현실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막 잠에 빠져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나는 밖에 나가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들려온 웃음소리에 ‘아, 누가 화난 건 아니구나’ 싶어 그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화난 듯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바깥의 공기는 싸늘해졌다. 지금쯤 거실에서 게임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색할까. 현장에 참여하지 않고 방 안에 누워있는 나도 이렇게나 뻘줌하고 어색한데 말이다.


다음날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그 사자후 남학생의 소행이었다고 했다. 술게임으로 마피아 게임을 하다가 자신이 계속해서 의심받자 화를 냈다는 것이다. 마피아 게임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동안 가능한 한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음해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이 남학생은 자신이 마피아가 아닌데도 마피아로 의심받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싫었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마피아로 몰아가자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젓가락을 집어던졌다는 것이다. 그 후로 술자리의 분위기는 싸해졌고 얼마 가지 않아 자리를 파했다고 한다.


그의 활약은 2년 내내 계속되었다. 교수님의 수업 중에 갑자기 그건 틀렸다고 벌컥 화를 내며 끼어드는가 하면, 동기들의 통역을 크리틱(상대방의 통역을 듣고 잘한 점과 아쉬운 점을 짚어주는 것)할 때 ‘이것도 몰라서 놀랐다’라는 위험 발언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통역을 크리틱하는 동기들이 자신을 시기해서, 또는 얼마 없는 남자라서 일부러 트집을 잡는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의 활약에 압도된 동기들은 점점 그를 피하게 되었고, 그는 지금까지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전설의 인물로 남아 있다.


네 번째, 문자 협박범

통대는 기본적으로 크리틱이 난무하는 곳이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견딜 자신이 없다면 통대에 오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만났던 통대나 학원 동기들은 대부분 열린 마음으로 크리틱을 받아들이고 이를 기반으로 실력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크리틱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크리틱하는 사람에게 앙심을 품거나 자신에 대한 질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한 남학생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공격 성향을 장착한 데다 자기애가 꽤 강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는 동기들의 크리틱을 받으면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그 동기에 대한 보복 크리틱도 서슴지 않았다. 급기야는 크리틱을 적극적으로 했다는 이유만으로 동기 몇 명에게 협박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 중에는 죽여버리겠다는 극단적인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새벽이나 밤에 섬뜩한 내용의 협박 문자를 받은 동기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결국 참다 못한 동기들이 교수님께 그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 남학생은 자신의 소행이 밝혀지자 휴학을 했다고 한다. 바로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마치 스릴러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통대 입학 면접을 볼 때 공격성이나 반사회성이 내재되어 있지는 않은지 측정하는 테스트라도 실시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는 2년 전에 건너건너 전해들은 것이라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남학생이 동기들을 문자로 협박한 것은 분명하다.)


그 밖에도 합격생 신분으로 입시 설명회에 가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은 국회의원 코스프레 통대생과,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을 2층에서 음침한 아우라를 풍기며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통대생, 자신과 친해지면 다른 사람들과 교묘하게 이간질을 일삼던 통대생, 겨드랑이가 훤히 보이는 민소매에 엉덩이골까지 내려오는 바지로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력을 공격하던 통대생 등등 통대 돌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새울 정도로 많으나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겠다.


마치며

지금까지 통대에서 마주친 돌아이들의 썰을 신나게 풀었다. 사실 대표적인 돌아이들 이야기만 풀었을 뿐, 실제 돌아이들의 소소한 일화는 위에서 언급한 것보다 훨씬 많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통대생들이나 통대 출신들의 성격이 이상하다고 성급하게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다만 통대에서 돌아이가 많이 배출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가설을 세웠는데, 통대라는 공간 특성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사람들을 마주해야 하다 보니 사회적 얼굴로 감추기 힘든 돌아이같은 본성이 튀어나오기 쉽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 주시길.


사실 돌아이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나에게 한없이 좋은 사람도 남에게는 돌아이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최대한 상식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천하의 돌아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나의 ‘상식’에서 조금 벗어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섣불리 돌아이로 규정하지는 말아야겠다. 물론 누가 보기에도 돌아이인 경우는 제외하고. 오늘도 옆자리의 돌아이 때문에 고통받고 계신 전국의 모든 학생과 직장인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이미지 출처: https://pokemon.fandom.com/ko/wiki/%EC%9B%85%EC%9D%98_%EA%BC%AC%EB%A7%88%EB%8F%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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