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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선생 Nov 02. 2020

3. 통대 오지 말아요

부탁이니까 제발

요즘 ‘변호사 되지 말아요’라는 노래가 인기다. 현직 변호사가 법대에 입학한 신입생 앞에서 춤을 추며 ‘변호사가 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을 나열한다. 멜로디 자체는 흥겹지만 가사 한 줄 한 줄마다 변호사라는 직업의 깊은 고충이 담겨있는 웃픈 노래다. 이 노래가 인기를 끌자 각 직업군을 소재로 한 패러디가 쏟아져 나왔는데, 공무원, 교사, 회계사, 파티쉐 등등 종류도 다양하고 저마다 고충도 다양하다. ‘통번역사 되지 말아요’ 또는 ‘통대 오지 말아요’라는 제목의 패러디는 아직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선수를 쳐야겠다. 통대 자체가 워낙 체력적, 정신적으로 힘든 공간이기는 하지만 사람에 따라 통대가 체질에 맞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통대에 오면 안 되는 유형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만약 자신이 아래에 나열하는 유형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통대 입학을 재고해보길 바란다. 


1. 취직하고 싶어요!

많은 사람들이 통대 입학과 동시에 취업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통대에 대한 대표적인 환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통대 졸업장을 취득하면 여기저기서 취업 제의가 오고 자동으로 일감이 생길 것만 같지만, 현실은 이력서에 ‘통대 졸업’이라는 말이 한 줄 추가된 나이 많은 취준생일 뿐이다. 


사실 대부분의 기업들은 통대가 무엇인지, 뭐하는 곳인지조차 잘 모른다. 그러니 치열한 경쟁을 뚫고 통대에 입학한 뒤 2년 간의 피나는 수련 과정을 거쳐 전문적인 통번역사로 거듭난 나의 노고를 그들이 알아줄 리 없다. 심지어 ‘통대 출신은 몸값이 비싸다’, ‘콧대가 높다’는 이유로 ‘비통대 출신 통번역사’를 찾는 기업도 있다. (이 무슨 의사 면허증 없는 의사 찾는 소린가!) 이런 기업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정석 통번역사보다는 적당히 실무를 처리하면서 적당히 통번역을 할 수 있는 ‘적당히형 인재’를 원하기 때문에 이력서에 아무리 통대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도 졸업 후에 당당히 ‘XX통번역대학원 졸업’이라고 쓴 이력서를 여러 군데 넣어봤지만 통대 출신이라고 해서 이력서만 보고 바로 채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샘플 번역 테스트를 위한 파일이 답장으로 왔을 뿐이다. 이 테스트에 응시해서 합격해야만 비로소 해당 회사의 번역가로서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지원한 회사들은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아예 보지 않고 일괄적으로 테스트 파일을 보낸 것 같다. 내가 받은 메일들이 모두 ‘우리 회사의 번역가로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복붙한 듯한 사무적인 문장으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나는 통대 출신에 대한 그 어떤 메리트도 없이 수많은 비통대 출신 번역가 지원자들과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해야 했다. 


요약하자면, 통대 졸업장은 실제 채용 과정에서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오히려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기피 대상이 되기도 한다. 기업들은 통대라는 기관에 대한 인지도도 낮은 편이고 통번역 업무만을 하는 정석 통번역사보다는 다른 업무도 같이 맡을 수 있는 인재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니 오로지 취직만을 위해 통대에 입학하려 한다면 다시 생각해보길 권한다.   


2. 돈 많이 벌고 싶어요!

통대에 입학한 뒤 처음 듣는 수업에서 하는 자기소개에서 신입생의 단꿈에 젖어있던 나는 ‘통번역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라고 패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교수님께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통번역으로는 돈 많이 못 벌텐데…...”


교수님의 말씀에 기가 약간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통번역을 통해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통번역사가 된다면 틀림없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통번역 알바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 믿음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나는 깨달았다. 통번역으로 돈 많이 벌기는 무리구나. 이 직업은 그냥 보람있는 맛으로 하는 거구나. 


통번역사가 다른 직업에 비해서 돈을 심각하게 못 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잘 벌지도 않는다. 내 생각에는 ‘중하’에서 ‘중상’ 정도인 것 같다. 통번역사로서 벌어들이는 수입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첫째, 불안정하다. 통번역, 특히 통역은 성수기와 비수기의 차이가 심한 편이다. 통역이 몰리는 때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없을 때에는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한다. 번역은 통역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일감의 양에 따라 수입이 요동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달마다 일정한 액수의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와야 안심이 되는 안정지향형 인간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직업이다.


둘째, 단가가 낮다. 한국외대 통번역센터에서 제시하는 통번역 요율표를 보면 통번역사의 수입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요율표대로 통번역료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번역의 경우 요율표 가격의 반, 아니, 반의 반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중한 번역 요율이 자당 80원이라면 현실에서는 20원도 못 받는 것이다. 그나마 20원이라도 받으면 잘 받는 축에 속한다. 요즘에는 공급이 워낙 많아 단가가 자당 2원까지 하락한 경우도 보았다. 통역도 못 벌기는 마찬가지다. 국제회의처럼 큰 규모의 행사면 모를까 일반 행사에서 통역을 맡으면 몇 시간 고생한 것에 비해 턱없이 낮은 통역료가 통장에 꽂힌다. 특히 요즘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일감마저 적어 더 힘들다. 


다시 말해 통번역만 가지고는 돈 많이 못 번다. 수입이 불안정하고 그마저도 별로 높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많은 통번역사들이 과외, 학원 강의, 방송 등을 통해 부수입을 번다. 돈 많이 벌려면 통번역사 하지 말고 그냥 사업을 하라.   


3. 전문직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통번역사는 전문직이 맞다. 통번역사는 전문적인 교육 과정과 수많은 현장 경험을 거쳐 육성되는 전문직이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나가면 전문직에 걸맞는 대우를 못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통역사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으니 통역사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통역사는 멋있고 스마트한 전문직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동료 통역사들 사이에서도 이런 이미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현장에서 통역사는 그냥 ‘서비스직 1인’이다. ‘어이, 통역’은 양반이고 ‘언니’, ‘아가씨’, ‘학생’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 남들의 시선이 있으니 화려하게 꾸미고 화장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기도 한다. ‘전문직’이라기보다는 ‘젊은 여성’ 취급을 받는 것이다. 


통역사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다. 사전 자료는 통역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존재인데, 기밀이나 체면 유지를 이유로 자료를 행사 직전에 제공하거나 아예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 게다가 통역사가 직접 요청을 해야만 주는 경우도 많다. 기본적으로 ‘통역사라면 듣자마자 통역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마인드를 장착한 기업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자료 요청을 하는 통역사에게 ‘어디 감히 통역사 따위가 나에게 요구를 하느냐’며 호통을 치는 높으신 분도 계셨다. 


물론 모든 기업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자료 제공 등의 배려도 하지 않은 채 양질의 통역을 기대하거나 통역사를 하대하는 경우를 나는 너무나 많이 보고 들었다. 이것은 통번역사라는 직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분위기와 인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적인 명예를 누리고 싶은 분이라면 통번역사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 서비스직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을인 데다 생각만큼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1. 취직 2. 돈 3. 명예를 위해 통번역사의 길에 들어서려는 분이라면 말리고 싶다. 통번역사는 돈이나 명예보다는 보람과 책임감으로 작동하는 직업이므로 위의 세 가지를 바라고 통대에 입학할 경우 많이 실망할 수 있다. 분명 보람차고 좋은 직업인 것은 확실하지만 취직을 원한다면 경력부터 쌓기를, 돈을 원한다면 사업가나 의사 또는 변호사가 되기를, 명예를 원한다면 교수나 고위 공무원이 되기를 추천한다.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15-uVbEsM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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