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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y 27. 2018

루머의 루머의 루머 시즌2

스포주의, 그리고 드라마보다 많은 내 이야기

드디어 루머의 루머의 루머 시즌2가 얼마 전 넷플릭스에 업로드 됐다.


실은 어제 약간은 속상한 일이 있었다.


불법 촬영회 사건이 폭로된 이후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피해호소인 양예원 씨가 스브스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머니투데이가 딱히 보도의 이유나 가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는, 아무튼 단독이랍시고 보도했던 그 카톡 내용은 이미 며칠 전에 먼저 팀이 입수했고 팀 내에서도 그걸 두고 열띤 토론이 있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이게 왜 양예원 씨의 주장을 뒤엎는 증거가 되는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복구가 되지 않았다는 점, 첫 촬영 이후 아무리 생계가 급해도 도저히 못하겠다는 양예원 씨의 카톡, 그 이후 중요한 이야기들이 오갔을 지점에서 실장은 온통 전화를 요구했다. 카톡 사이사이 전화로 하자는 말을 몇 번이나 봤는지. 이 카톡으론 결코 양예원 씨의 주장을 뒤엎을 수가 없는데, 심지어 수사 기관마저 이 카톡을 증거로 삼을 수가 없다고, 머니투데이의 보도를 두고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전형적인 가해자들의 수법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와중에 무고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양예원이라는 피해호소인의 이름을 달아 만들어야 된다는 청원이 올라왔고 8만 명이나 청원에 응했다.


생계가 어려운 젊은 여성,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초기 합의된 촬영 컨셉과 완전히 달라진 컨셉을 당일에도 그 이후에도 협박으로 밀어부친 실장, 촬영회라는 명목으로 성추행을 저지른 촬영회 사진 작가들,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 하지 못하겠다는 어린 여성에게 손해배상이니 사진을 갖고 있다느니 협박 아닌 협박을 해댄 실장, 사진을 유출한 남성, 그리고 그 사진을 음란물 사이트에 퍼다 나르고 다운을 받은 수많은 남성들. 양예원을 꽃뱀 취급하며 청원을 해대는 남성들. 이 남성 연대. 이 역겨운 남성 연대. 서로 부추기고 모른 척 눈 감아주고 범죄를 저지를 자리를 마련해주는, 서로 돕고 돕는 이 역겨운 남성 연대.  


그러다 어제 오전, 남자친구가 이 기사를 봤다며 좀 분위기가 바뀌어 가는 느낌이라고 운을 띄웠다. 그래서 나름대로 양예원의 인터뷰, 이미 읽어본 복구된 카톡 내용, 그리고 내 생각을 전했는데. 남자친구는 양예원 진술에 거짓이 있으니 판단하기 어렵고 그러니 중립이라며, 정말로 쉽게 중립이라고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허탈했다. 이토록 쉽게 중립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이런 성폭력 사건이 있을 때마다 수도 없이 들어본 난 중립이라는 말들.


내가 이번 촬영회 사건이나 한샘 성폭력 사건에나 열을 올리고 목소리를 높이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것은 시간이 많아서가, 피해자가 불쌍해서 이딴 이유가 아니다. 그냥 하나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해왔거나 앞으로 충분히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돈이 없는 어린 여성이 사회에서, 또는 직장 내에서, 또는 데이트 관계에서, 또는 기타의 상하 관계에서. 충분히 당할 수 있는 일이고, 일부는 당했기도 한 일이니까. 그럴 때마다 진절머리나는 사람들의 반응들. 중립을 운운하며 실제론 가해자의 곁에 서 있는 사람들. 피해자에게 "흠결 없는 피해자의 모습"을 바라는 사람들. 피해자는 늘 착하고 선하고 올바라야 하며 아무런 흠결이 없어야 하며 순결해야 하고 늘 일관적이어야 하며 그 어떠한 거짓말도 욕망도 없는 3년 전 일도 또렷히 정확히 기억을 해야만 하는, 힘들어 하고 밝지 않고 무기력해야 하는 그런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을 바라는 사람들. 나는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수도 없이 두려워 지는데, 과거에나 지금에나 미래에나 이런 문제를 겪을 수 있는 나는 지극히 보통 사람이고, 그 보통 사람인 나는 흠결도 많고 단점도 많고 실수도 많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숱한 다른 피해자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인 보통 사람이라는 점이, 그래서 저 칼날이 언젠가는 나를 향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 두려움을 늘 느낀다.


나 역시 소개팅에 나갔다 성추행을 당했고 버스에서도 성추행을 당했다. 어쩌면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약물 강간을 당했을 수도 있고, 앞으로 무슨 일을 살면서 겪을지 모른다. 그래서 남자를 만나러 소개팅에 나갔다는 사실이 성추행이 있었단 사실을 뒤집을 수 있나? 다음날 내가 호의 넘치게 예의 바르게 거절 문자를 남긴 것이 성추행은 없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나? 몇 년 전 버스에서 당한 성추행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 하다 몇 가지를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했다면 그게 내가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나? 내가 약물 강간을 당할 뻔 한 사실이, 내가 술 먹고 취해 남자랑 놀았다는 그 전의 맥락 하나 때문에 지워질 수 있냐는 거다. 혹은, 섹스를 이야기하고 글로 쓰는 여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성폭력을 당해도 나는 조금 까진 여자이기 때문에 내 말은 딱히 믿을 수 없는 그런 근거가 되냔 말이다.


성폭력 피해자들 대부분은 당시에 문제를 회피하고 그러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시키기도 하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굴기도 한다. 성폭력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주장의 일관성이 굉장히 중요하고 유효한 근거로 삼아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일관성이 그만큼이나 어렵다는 점도 사실이다. 중립을 이야기하는 남성들은, 우리가 강간 당한 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를 테면 날짜와 시간이 나온 핸드폰 잠금 화면을 캡쳐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들에게 강간 당한 사건을 이야기 하고 주변의 사진들을 찍어두고 몸을 씻지 않은 채 강간 당할 때 입었던 옷들을 그대로 챙겨 신고 한 뒤 해바라기 센터로 가고, 이 모든 과정을 가급적이면 정확한 시간대로 메모장에 남기거나 녹음을 해야 하는, 후에 강간 재판에서 내가 정말로 강간을 당했다고 제대로 일관성 있게 신빙성 있게 입증하기 위해 정리해 둔 이런 매뉴얼을 sns에서 나만 보기로 공유해두고 외워두려고 하는 걸 그네들은 알고 있을까. 이것마저도 제대로 교육으로 다뤄지지 않는 사회에서 얼마나 피해자들의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하는지, 그 과정에서 사건과 관계없는 평판, 루머, 어떠한 것들로 주저 앉혀지는지 모든 걸 포기하게 되는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남자친구에게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야기를 다시 듣더니 당황하며 이전의 말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남자친구 이전에 남초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그 중립 기어라는 그 신조어가, 나는 정말로 그들은 이런 문제에 팔짱 끼고 방관해도 아무 문제를 겪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생 가능한 단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겐 그건 그들의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성폭력이든 성폭력 발생 후 나에게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을 바라는 그런 일들은 그들의 삶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까 중립 기어 같은 방관의 단어를 손쉽게 쓸 수 있겠다 싶었다. 부럽기도 했다. 나는 이런 일들이 공론화 될 때마다 앞으로 내가 겪지 않기 위해서, 내 친구가 내 엄마가 겪지 않기 위해서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을 바라는 모습을 내가 당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과 사회를 비난하지만, 그들은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된다. 그럴 일을 겪을 확률이 매우 낮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그게 나는 못 견디게 억울하고 역겹고 분하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그런 지점을 너무나 잘 꼬집는다. 시즌 1에서 해나 배이커는 자살 직전 테이프에 유언을 녹음한다. 강간을 당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주변의 이들에게 도움을 받지 못한 해나는 학교 내의, 남자아이들 사이의 그런 역겨운 연대와 강간 문화, 그리고 친구들의 방관을 테이프에 담담하게 담아낸다.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생각하는지, 어떤 것들이 성폭력인지, 남자들은 쉽게 알지 못하는 그런 부분까지 해나는 테이프에서 이야기한다. 시즌 2에서는 학교 내 강간 문화와 해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학교에 묻는 해나 엄마와 학교 간의 소송이 그려진다. 여기에서 해나에 대한 여러 친구들의 증언과 피고(학교) 변호사의 변론은 많은 생각 거리를 남겨주는데.

해나는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그는 전학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남학생들과 데이트를 하고 섹스도 한다. 술에 심하게 취하기도 하고 마약을 하기도 한다. 그는 거짓말을 한 적도 있고 친구들에게 나쁜 말을 한 적도 있다. 그는 학교에서 평판이 좋지도 않았다. 걸핏하면 학교 화장실엔 bitch나 slut 같은 낙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그의 친구가 강간 당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지만 신고 하지도 못했다.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 중에서는 조금은 과장된 부분도 있다. 해나는 유난하게 나쁜 아이도 특출나게 착하거나 모범적인 아이도 아닌 그냥 평범한 다른 10대들 같은 10대였다. 그래서 그가 강간 당한 게 사실이 아닌 게 되나? 그래서 그가 꽃뱀인가? 그래서 그 강간범은, 그래서 학교는 책임이 없어지나?

시즌1에서는 오히려 해나의 흠결을 더 꼬집고 이 문제에서 한발짝 물러서려고 했던 테이프의 주인공들이 시즌2에서는 해나 엄마의 소송을 승소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방관을 인정하고 해나에게 손을 뻗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학교 내의, 남학생들 사이의 강간 문화와 그 남성 연대를 반성한다.


그래서 양예원 씨가 실장의 협박과 회유에, 그리고 돈에 일정을 잡아 달라고 학원비 마련해야 한다고 보낸 그 카톡 한 두 개 때문에,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가해자들의 성추행, 협박, 유포 이 모든 혐의들이 사라지나?


이번 불법 촬영회 사건에서 너무나도 화가 난 지점은 그 역겨운 남성 연대 때문이었다. 실장과 촬영회에 참여한 남성들은 어느 정도 돈과 나이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남성들은, 돈이 없는 나이가 어린 여성이 돈을 벌기 위해 반 협박에 의해 초기에 합의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앉아 사진을 찍히고 성추행을 당하는데도 그중 아무도 그 상황을 말리거나 거부하거나 문제제기 하지 않았다. 실장은 처음 피해자가 도저히 못하겠다고, 아무리 돈 때문이라지만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을 때 그냥 알겠다고 했어야 했다. 성폭력 이후의 충격과 생계 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그 피해자에게 실장은 그만 알겠다고 했어야 했다. 실장이나 촬영회 참가한 사람들이나 사진을 유출한 사람이나 유통하고 다운을 받은 사람들이나 청원을 하는 사람들이나 다 역겨운 남성 연대다.

차라리 정말로 이 사건에 대해 판단을 못하겠으면, 그러면 조용히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 된다. 물론 한국의 성폭력 법은 UN에서 권고를 받을 정도로 그 구성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히고 반항을 하지 않으면 쉽게 인정이 되지도 않는다. 자신의 노출 사진이 평생 인터넷에 남아 떠돌아 다녀도 그 가해자에게 달랑 벌금 몇 백만 원 물리는 사회란 점은 알아두자.


나는 그냥 앞으로 내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는 사회면 좋겠고, 정말 운이 나빠 당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흠결 없음을 입증하지 않아도 오롯한 내 피해 사실로만 내가 피해자임을 밝힐 수 있는 그런 사회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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