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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Jul 20. 2018

클리토리스, 오르가즘

에곤 쉴레 그림이 검열에 걸려 브런치에서 삭제됐던 글 재업

남성의 몸이 있어온 것처럼, 여성의 몸도 항상 같이 있어왔다. 그러나 어쩐지 여성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지워지기 일쑤이거나 곧잘 타자화 되곤 했다. 여성의 성욕이라든가 여성의 자아실현이라든가 여성의 몸과 같은 이야기들은 늘상 남성의 시선에서 그려지곤 했다.


그중 여성의 성욕이 거세되는 현상은 단연 돋보인다. 온갖 미디어에서는 여성을 시종일관 정숙하고 순결한 성녀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은 남성의 전유물이 되었다. 섹스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는 여자는, 걘 좀 밝히더라, 그거 뭐 따먹어 달라는 거 아니냐? 로 종종 이야기 된다. 섹스를 잘하는 여자는 창녀나 명기(名妓)가 된다. 평소엔 성녀지만 나와의 침대에서만은 아다창녀여야 한다. 남성의 자위는 웃음 소재로도 쓰이는 이 시대에 여성의 자위는 이야기된 기억이 없다. 섹스의 느낌(침대 위에서 연인과의 키스)을 풍긴 설리가 그토록 논쟁 거리가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처음 자위를 해본 나이는 그리 이르지 않았고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 전까진 정확히 내 성기가 어떻게 생긴지조차도 몰랐다. 외국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생각보다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이,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성기가 어떻게 생긴지조차도 모른다고 하니 한국이라고 나을리가. 자신의 성기를 거울에 비춰보며 어떻게 생겼나, 클리토리스가 어디에 있나, 자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상대가 어떻게 만져주었을 때 좋은가, 제대로 알고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여전히 몇 남성들은 별 관심이 없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은 모르지만 대충 만지다 삽입하면 되겠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남성이든 여성이든 함께 섹스 이야기를 하면 공감과 더불어 자주 귀결되는 결론이 하나 있었다. ‘뭔가 하긴 하는데 무언가 정확히는 잘 모른다’는 것. 그때만 해도 아직 첫 섹스를 하지 못한 사람도 주변에 많았고, 하더라도 경험 표본이 적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결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몸으로 직접 느낀 경험도 있다.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몰랐다. 어디를 어떻게 만져야 내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등에 대한 고민은 없어보였다. 개개인의 몸마다 편차가 있기 때문에 같은 '여자'와 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기본적인 노력과 시도가 필요하다.


이렇게 무지에, 서로 알 생각이 없으니 섹스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놈의 성녀와 창녀 사이의 프레임 속에서, ‘어디를 어떻게 만져주었을 때 좋다’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부끄러워 이야기도 못하는 여성이 생각보다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섹스가 정말 즐거울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사람이 오르가즘을 반드시 느낄 수 있어야만 하고 느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이 문제가 단순히 오르가즘의 문제만은 아니란 것이다.



성과 섹스의 담론에서 여성의 성욕은 자주 거세된다. 어린 시절부터 강요당한 정숙함과 순결함이 체화된 여성에게,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수면 위로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섹스에서조차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어느 정도 사회적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섹스 테라피스트이자 저자인 이언 커너는 이런 현상을 ‘삽입 담론’이라 부른다.


“삽입 담론은 페니스를 클리토리스 위에 두는 헤게모니를 지지합니다. 남성의 성적 반응에 잘 맞아 들어가는 직선적 섹슈얼 내러티브를 강요하고, 결과적으로 여성의 오르가슴을 성적 쾌감의 변두리로 격하시킵니다. ‘여성은 남성만큼 강하게 오르가슴을 원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 비슷한 즉흥적인 욕구를 경험해야 한다’와 같은 프로파간다가 여기에서 생깁니다.”


클리토리스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여성의 몸을 잘 아는 것은 여성 본인에게도, 그 파트너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클리토리스를 잘 모른다는 것은 오르가즘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클리토리스를 알면 오줌 구멍과 질 구멍을 구분 못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엄한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 넣거나, 아무 곳이나 더듬더듬 거리거나, 탐폰을 꼈을 때 흥분되냐와 같은 물음이 나오지 않게 된다.



남성의 페니스만 발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큰 여성의 클리토리스는 그 전체가 오르가즘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삽입 전의 적절한 애무와 전희를 통해 클리토리스의 위쪽 부분이 남성의 페니스처럼 발기된다. 발기된 클리토리스를 '잘' 만져주면 오르가즘을 느끼게 된다. 사람마다 이 클리토리스를 어떻게 만져주었을 때 흥분을 느낄 수 있냐, 오르가즘에 도달하냐는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클리토리스의 특정 부위에 더 예민하게 반응해 오르가즘에 도달하고, 어떤 사람은 전체적으로 만졌을 때 더욱 쉽게 도달한다. 손으로 만져주는 것에 더 쉽게, 또 어떤 사람은 입으로 해주는 것으로 더 쉽게 오르가즘에 도달한다.


답은 없다. 오르가즘에 도달하기 위해선 노력충이 되어야 한다. 그 노력은 지나치게 상식적이다. 파트너와 대화를 많이 한다. 이렇게 만질 때 좋다, 이렇게 만져봐라, 다르게 해봐라, 입으로 해달라, 혹은 도구로 혹은 손으로 혹은 윤활유의 도움으로.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전제는, 당사자인 여성이 스스로의 몸에 대해 잘 아는 것이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면, 손거울을 들고 다리를 벌리고 살펴 보자. 샤워하면서 자연스레 내 몸을 보아왔듯이 거울로 내 성기도 자연스레 살펴보자. 어디가 클리토리스고 어디가 질 구멍이고 어디가 오줌 누는 곳인지 정확히 알아보자. 그리고 혼자 시도도 해보자. 어떻게 만졌을 때 발기를 하고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지 혼자서 느껴보자. 자기 몸에 대해 잘 알게 되면 파트너에게 요구하기도 쉽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파트너의 쾌락만을 위한 섹스는 하지 않는 것이다. 남성의 삽입부터 남성의 오르가즘까지의 과정이 섹스는 아니다. 전희를 포함한 모든 과정이 섹스이며 삽입없이 여성이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과정 역시 섹스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혹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조급해 말고 미안함이라는 이상한 감정은 느끼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오르가즘에 도달할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클리토리스, 오르가즘, 그리고 여성의 성욕에 대해 주체적으로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로의 지향은 기존의 여성의 몸과 성욕에 대한 패러다임을 천천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여성의 몸과 섹스는 아이를 출산하는 재생산의 역할을 위한 것이 아니며, 순결하고 청정해야 할 것이 아니다. 여성의 몸은 존재하는 그대로 인정받고 주체적으로 드러내며 자유롭게 이야기돼야 하는 것이다. 나의 오르가즘을 위해서, 그래서 우리의 더 좋은 섹스를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 우리는 여성의 몸을 이야기 해야 한다.



참고로 이 글은 재작년에 브런치에 올린 글인데 에곤 쉴레의 여성 나체의 하체 그림이 청소년 보호법 어쩌구 음란물 어쩌고에 걸려서 삭제 됐다. 물론 조치를 취하라고 미리 연락이 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왜 음란물이며 왜 '청소년을 보호' 해야 하는지도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아 수정을 미뤘고 결국 짤렸다. ㅎ~ 물론 브런치의 잘못이라기 보다 방통위의 이상한 법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글을 다시 옮기고 이미지는 뭘로 해야 되나 촴놔~ 세상의 기원으로 해놔도 짤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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