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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Oct 06. 2022

나와 책의 연대기

친구들이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할 때, 우리 집에는 책만 쌓였다

나와 책의 연대기는 아버지에서 시작된다. 책을 경외한 나머지, 감히 작가를 꿈꾸지 못한 남자. 그는 약한 장남이었다. “사내 새끼가 만날 울어.” 할아버지 눈 밖에 난 것이 언제였을까. 고모들은 여자라서, 작은아버지는 막내라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았다. 아버지는 멀찍이 떨어져, 다섯 식구를 바라봤다. 겨울이면 입김이 나오는 다락이 아버지의 유일한 자리였다. 부엌 위 너저분한 물건이 쌓인 다락 구석에 책과 라디오, 이부자리가 있었다. 아버지는 홀로 Carpenters의 「Yesterday Once More」를 들으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싱클레어가 있어 긴긴밤을 견딜 수 있었어.”


아버지는 평생 책을 맴돌았다. 친구들이 신도시의 넓은 아파트로 이사할 때, 우리 집에는 책만 그득히 쌓였다.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책부터 샀다. 좁은 거실 벽면은 책장으로 빙 둘렸고, 어느새 안방까지 점령했다. 책장 안에 세로 열 맞춰 꽂힌 책 위로 책이 쌓이고, 결국 앞쪽까지 마구 자리를 잡았다. 그때 주택 적금을 부었다면, 아버지가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 전셋집을 기웃거리지는 않을 텐데…. 여러 번 이사를 거듭해도 수십 권의 필사 노트는 책꽂이 맨 윗자리를 지켰다. 바스러질 것 같은 누런 종이에 반듯한 아버지의 글씨가 담겨있다.


나는 1985년 초봄, 부천에서 태어났다. 15평짜리 다세대 주택에 여섯 식구가 살았다. 모두 나를 사랑했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는 엄마를 미워했다. 엄마의 젖에서 불안의 맛이 났다. 다행히 그곳에 책의 숨결이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서적의 곰팡냄새, 종이가 천천히 분해되면서 풍기는 바닐라 향에 안도했다. 나무였던 책이 만든 작은 숲에 담긴 느낌이랄까. 나는 그렇게 책의 분위기를 먹으며 자랐다.


책은 많았지만 내 책은 없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삼국지를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어.” 여러 번 삼국지를 들췄지만, 인물이 헷갈리고, 지명 구분도 안 되었다. 아버지와 인생 논하기를 포기했다. 그때 『빨간 머리 앤』이나 『작은 아씨들』 같은 책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책이 무서웠다. 시험을 치르듯 책 검사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웅진 주니어 과학 전집, 계몽사 어린이 그림 위인전기를 분량만큼 읽고, 소감을 말했다. 아버지에게서 갑자기 “책은 읽었어?” 호령이 떨어지면, 나는 움츠러들어 책의 내용을 고했다.


아버지 기분은 두 개였다. 콧노래를 부르거나, 콧김을 내뿜었다. 나는 아버지가 천진한 아이인지, 소리치는 괴물인지 때마다 눈치를 살폈다. 다만 아버지는 책에 관대했다. 아홉 살 때 아버지와 서점에 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꽃향기가 났다. 새 책에서 나는 종이와 잉크, 접착제 냄새는 달콤했다. 고심 끝에 곽재구의 『아기 참새 찌꾸』를 사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가 “그렇게 긴 책을 읽을 수 있겠어?”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분홍 표지는 수줍었고, 그림은 다정했다. 무엇보다 영훈이와 찌꾸가 그려진 사은품 엽서가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돌아와 동생의 부러움을 견뎠다. 같이 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잔소리를 쏟아냈다. “살살 넘겨. 쫙 피지 마. 구기지 마.” 새 책의 광채를 아꼈다. 책은 손이 닿는 만큼 바랜다.


사촌 집에서 디즈니 명작 읽기에 빠졌는데, 엄마는 사주지 않았다. 한참 지나 디즈니 명작 비디오 판매 신문 광고를 봤다.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 이거 사주세요. 비디오 보면서 영어 공부도 할게요.” 『미녀와 야수』와 다른 몇 개가 집에 도착했다. 언제나 책을 끼고 다니는, 예쁘지만 이상한 아가씨, 벨에게 끌렸다. 야수의 서재는 찬란했다. 영어 공부를 구실로 비디오를 재생했다. 책에서 점점 멀어졌다. 세상은 재밌는 것을 계속 쏟아냈고, 어느 순간 아버지의 책 검사도 흐지부지해졌다. 읽기는 교과서만으로 충분해서, 집에 돌아오면 텔레비전을 보기 바빴다. 


아버지가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논하며, “그것도 몰라?”라고 물으면, 한참 동안 무안했다. 읽지 않은 나를 참회하듯 말했다. “저 그 책 안 읽었어요.” 혼자 되뇐다. ‘저는 책 속에 담겨 자랐어요.’ 이끌리듯 국문과에 진학하고, 숙명처럼 글을 썼다. 손이 베일만큼 날카롭다가 점점 뭉뚝해지는 종이의 물성을 사랑했다. 인생이 처참할 때, 책에게 묻고, 책에서 길을 찾았다. 몸에 각인된 책의 호흡이 나를 일으켰다. 나는 책보다 책의 풍경을 연모한다. 서점과 도서관은 모태처럼 편안하다. 한가득 이야기를 머금은 책은 언제나 침묵한다. 내가 찾기 전까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평생 읽다가 눈만 높아져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아버지 곁에서, 부족함을 안고 쓴다. 나를 알기 위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다.


Photo by Clarisse Mey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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