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꿈을 구겨버렸을 때 나는 결혼을 했다.
요리할 때 외둥이 칼을 쓴다. 신혼살림으로 장만한 칼을 12년째 쓰고 있다. 헹켈 쌍둥이 칼을 사고 싶었는데 50만 원이 넘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외둥이 칼이다. 헹켈 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쌍둥이 칼(TWIN)과 외둥이 칼(INTERNATIONAL)이다. 쌍둥이 칼은 독일에서 만들고, 외둥이 칼은 중국에서 만든다.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쌍둥이 칼 로고와 달리, 외둥이 칼 로고는 홀로 창을 집고 서 있어 힘 있어 보였다. 칼갈이에 칼을 잘 갈아 양파, 당근을 자르면 쓱쓱 잘 나갔다.
『소년이 온다』(한강, 2014)를 읽었다. 한쪽도 더 읽고 싶지 않을 만큼 눅진한 서사를 따라가는데, 아름다운 문장들이 나를 감쌌다. 소설은 정대와 정미가 죽은 채로 시작해서, 며칠 뒤 동호도 죽는다. 함께 상무관을 지켰던 은숙, 선주, 진수는 오래도록 아프거나 결국 죽는다. 이 어둡고 습한 이야기를 이토록 서정적으로 쓰다니…. 그건 감히 질투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질투였을까. 동생 정대가 챙겨 온 칠판지우개를 보고 정미가 쿡쿡 웃는 장면에 코끝이 시큰했다. 정대와 정미, 동호가 살았던 마당에 핀 접시꽃, 들장미 향이 나에게까지 번져오는 것 같았다. 핏물 같은 향이었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소설을 쓰겠다고 말한 지 몇 해째인가. 『소년이 온다』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런 소설은 쓸 수 없을 거라고…. 이 당연한 깨달음이 나에겐 참 더뎠다. 작가를 꿈꾸면서, 내가 대단한 작품을 쓸 줄 알았다. 스물여덟 소설가의 꿈을 구겨버렸을 때 나는 결혼을 했다. 서른여덟, 다시 소설가의 꿈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故 박완서 소설가도 마흔에 등단했다는 사실이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그러나 내 손에 더 많은 시간 들려있는 것은 펜이 아니라 칼이었다. 엄마로 살면서, 밥벌이를 하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고3 수험생처럼 살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마 이번 생에서 대단한 소설을 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한 지인이 내게 말했다. “에세이를 잘 쓰면서 왜 소설을 쓰려고 해요?” 곰곰 생각하다가 흠칫 놀랐다. 소설이 더 대단한 글이니까, 소설이 에세이보다 더 명품이니까, 소설이 쌍둥이 칼이라면 에세이는 외둥이 칼이니까.(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내 논리를 나에게 들켰을 때, 내가 나에게서 숨고 싶었다.
『나의 해방일지』(박해영, 2022)에 나오는 해방클럽의 세 가지 강령은 이렇다. 첫째, 행복한 척하지 않는다. 둘째,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셋째, 정직하게 보겠다. 어떤 날은 들떠서 마치 내가 50만 원짜리 명품이라도 되는 양 행복한 척했다. 어떤 날은 화가 나서 마치 내 인생이 5백 원짜리 철수세미인 듯 불행한 척했다. 학벌, 외모, 집안을 비교하여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을 우러러보며, 그들은 빈틈없이 행복할 것이라 여겼다. 그들 앞에서 나에겐 먼지만큼의 행복도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불행하려고 애썼다. 쓰는 사람으로서, 하층민으로 살아온 삶은 무기이기도 했으니까. 더 구차하게, 더 슬프게 내 아픔에 몰입했다. 명품이 못 될 바에야 철수세미가 되어 어떻게든 반짝이고 싶었다. 그것이 내 살을 갉아먹는 것이라 해도 그로 인해 인정받을 수 있다면 괜찮았다. 그러나 정직하게 보면 나는 명품도 철수세미도 아니다. 단지 5만 원쯤 하는 외둥이 칼이다.
헹켈 쌍둥이 칼 같은 인간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외둥이 칼로 사는 것이다. 대단한 작품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아주 잘 쓰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너의 글을 너만큼 쓰면 된다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글쓰기가 어려웠던 것은 언제나 내가 나 이상으로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만큼 쓴다면 그리 어려울 일이 아닌데, 나는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잘 쓰고 싶어서, 실은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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