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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Feb 15. 2024

plan75

생각하는 우체통

  설명절이 끝났다. 식구들은 각자 제 자리로 갔고 일상을 시작했다. 명절이 끝나고 나는 유투브에 올라온 plan75의 짧은 영상을 보고 이끌리듯 영화예매를 했다. 오랜만에 혼자서 영화를 보러간다. 그런데 들뜨지 않는다. 영화관까지의 걸음을 유도한 건 영화의 분위기였다. 이상하게도 영화 예고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침울하게 나의 일상을 채웠다. 새벽미사를 드리러 가면 많은 수의 노인들과 그들과 함께 온 나이 든 중년의 자녀들이 대다수다. 새벽 시간이라 아이들은 거의 없다. 미사는 조용히 진행되고 사람들의 표정엔 어떤 무게가 실려있다. 그나마 그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해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행복한 노인들이다.


  영화관에 들어가 앉는다. 관객도 거의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또래다. 영화관 실내가 어두워지면 스크린에 젊은 청년이 팔뚝에 피범벅이 되어 서있는 뒷모습이 시야를 막는다. 그는 조용히 나레이션을 한다. 고령화사회로 인해 피해는 오롯이 젊은이의 몫이라고. 국가를 위해 죽는 건 일본인에겐 낯설지 않은 일이라고. 쓰러져있는 휠체어와 지팡이는 노인을 상징하고 젊은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호텔에서 일하는 미치와 이에코 일행의 일하는 모습과 대화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뉴스가 흘러나온다. 고령화 문제로 살해되는 노인의 문제, 젊은이들과의 갈등, 그걸 해결하는 의결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속보다. plan75, 정부 주도하에 75세이상의 노인이 죽게 도와주는 의결안이다. 가난과 외로움에 몰린 노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죽기 전에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지불되는 10만엔이 전부다. 미치는 이에코의 죽음이후 호텔에서 해고된다. 78세의 할머니를 고용할 사업자는 없다. 길거리의 공사 구간에서 정리원으로 잠깐 일하지만 노인인 미치에겐 힘겹기만 하다. 결국 미치는 플랜75를 선택한다.

  히로무는 플랜75의 담당공무원이다.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하는 히로무에게 사람들이 항의하며 물감을 던지기도 하지만 히로무는 자신의 일을 할뿐이다. plan75 무 중 히로무는 20년 전 헤어진 삼촌을 만난다. 플랜75를 선택하는 삼촌, 그동안 연락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던 삼촌은 일본 전역에서 사회 기간산업의 노동자로 살아왔고 이동하는 도시에서 늘 습관처럼 헌혈을 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살았던 삼촌은 이제 몸이 늙자 쓰레기를 모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죽음을 선택하는 삼촌을 통해  노인들을 바라보게 되는 히로무. 그는 수많은 노인의 주검을 화장하는 화장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고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한 곳을 우연히 알게 된다. 동물의 분변이나 사체를 처리해주는 쓰레기처리장, 화장장이 부족해지자 버려지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곳에서까지 노인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을 알게 된 히로무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던 필리핀 출신의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딸의 심장병에 돈을 보태기 위해 죽은 노인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한다. 쓰레기 처리장에서 만나게 되는 미치와, 히로무, 마리아, 그리고 미치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그녀가 플랜75를 포기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던 요코, 그들에게 삶은 어떤 의미이고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가 끝나고 조용히 사람들이 일어서서 나간다. 크지 않은 극장에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보통의 영화가 끝난 후 시끌시끌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미치가 해가 지

는 풍경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는 게 오래 남는다. 영화의 결말은 예상이 가능했고 그게 조금의 아쉬움이었지만 다른 결말을 생각하기도 힘들다. 극장에서 집에까지 한 시간여를 걸어서 돌아왔다. 햇빛은 따뜻했고 겨울 같지 않은 날씨였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걷는 내내 화면 속에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집 밖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미치가 계속 뇌리를 맴돈다. 그녀의 깊은 한숨과 깨끗한 부엌과 살림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요코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미치, 요코와 볼링장에서 만나 볼링을 치는 그녀의 모습은 늙는 게 참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플랜75가 성공적으로 시행되며 경제적 이익을 숫자로 환산해서 이야기하며 그 연령을 65세로 내릴 것을 고려중이라는 대사가 아프게 가슴을 파고든다.


  75세의 나이는 늙음의 상징으로 사용된 숫자지만 늙음이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사처럼 과연 75세를 기점으로 늙은, 경제적으로 무능한 노인은 죽음으로 내몰려도 상관없을까. 또 75세라는 죽음의 시점을 받아들고 살아야 하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남아있는 삶은 어떤 무게로 진행될까. 쉽게 경계를 정하고 판단하고 좌지우지하는 정책이 가져올 파장, 인간에게 존엄이란 무엇인가를 걷는 내내 생각한다. 텔로미어를 연장하는 운동을 하고 줄기세포를 통해 노화를 막고 성형수술로 젊은 얼굴을 유지하는 돈 많은 노인에겐 남의 일인 늙음, 영화에서도 조명이 되는 건 늙어도 노동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만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사람답게 사는 건 오롯이 경제적 몫으로만 해석하고 바라봐야 할 것인지 묻게 된다. 직원 휴게실에서 사과를 깎아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웃음엔 불행은 엿볼 수 없다. 곧 영화 속에서 죽는 이에코조차 맛있게 사과를 먹고 있다. 삶에서 죽음은 멀리 있고 가까이에 친구와 웃음과 함께 나누는 소소한 행복이 있다. 이것이 영화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어쩌면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하염없이 우울해진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니까 굳이 오늘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고 다독이면서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고 문을 활짝 열었다.

다음 영화에서 이미지를 빌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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