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그림책을 봅니다. 글과 그림이 있으니 읽기도 하고 보기도 합니다. 그림책을 읽으면 책장이 빨리 넘겨지니까, 그림도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책을 덮은 후의 여운이 오래 남아서 좋아요. 그림책은 유아들이 읽는 책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어른이 읽어도 좋은 게 그림책입니다. 그런 그림책에 돈을 투자하기가 뭣하면 도서관에서 혹은 그림책이 있는 북카페에서 보고 제자리에 두고 나오시면 됩니다.
그림책에 대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 그리고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이나 '비밀의 방' 그리고 가까운 일본의 하야시 아키코의 '순이와 어린 동생', '이슬이의 첫 심부름' 같은 책들은 그림책을 설명하기 참 좋은 책들이었습니다. 그림책 작가들은 그림 작업을 하고 글을 쓰면서 책의 크기도 고민합니다. 그림 크기가 결국은 그림책 크기가 되겠지요? 하지만 처음에 한국에 소개된 그림책들은 전집이란 이름으로 똑같은 크기로 들어와 그림책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어린이 도서연구회와 지역의 동화읽는 어른 모임을 하는 엄마들의 역할 덕분에 이젠 많은 출판사에서 그 나라에서 출판된 그대로의 판본으로 책을 출판합니다. 그림책의 크기가 들쭉날쭉한 게 책장 속에서 소근소근 말을 거는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지각대장 존은 여전히 학교에 가다가 동물들을 만날 거 같고 이슬이가 심부름을 가다가 벽보에서 찾고 있던 고양이를 만날 것도 같고 괴물들이 수런수런 책장 밖으로 나가려고 힘을 쓰는 것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수업에서는 그림책이 주는 상상력의 확대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 그림책을 제대로 읽은 아이들이 어떻게 독서력이 깊어지는지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를 그림책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해야 글이 많은 책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책 읽기가 어려운 어른에게 저는 그래서 그림책 읽기를 많이 권합니다. 그림책은 아이들만이 읽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좋은 상상력과 힐링의 세계를 제공하니까요.
오랜만에 북카페에서 좋은 그림책을 만났습니다. 마리아 이바사키나의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입니다. 이 책은 아이들이 아닌 지금 힘든 청소년들이나 어른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사람과의 관계에 지치거나 마음이 허전한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림책엔 특별한 스토리가 없습니다. 전세계에 있는 단어와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적어놓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위로가 됩니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라의 이름과 그 나라에서 쓰는 어떤 단어와 숨은 의미를 설명하는 짧은 몇 줄의 글이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책의 표지이기도 한 포르투갈을 펼치면 '카푸네'라는 단어가 책의 맨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보고 앉은 두 사람이 가까운 곳에 그리고 멀리 일군의 사람들과 바다가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는 일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얼마나 따스한 말인가요. 그리고 그 밑에는 '사우다드'를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비슷합니다. 슬픔은 삶의 기본값이다. 행복이란 건 이미 스쳐갔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지요.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슬픔이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통해서야 우린 행복을 아주 극렬하게 갈망하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행복한 시간엔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말은 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기도 하지만 그 안에 있을 때는 행복이란 걸 느끼기 힘드니까요. 맑은 공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미세먼지 없는 날에 깨닫게 되는 것처럼요.
독일편에서 '토아슈루스파니크'는 잃어버린 기회와 흘러버린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페른베'는 아득히 먼 곳에 이끌리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기회와 흘러버린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가서 그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경험으로 두려움을 극복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림 속의 장면은 그 나라 특유의 감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이 책에 있는 나라를 모두 다녀온 건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그렇지만 이탈리아를 그린 달려가는 개와 천천히 느리게 저녁을 먹으며 음식을 음미하고 그 시간 자체를 즐기는 '아르치골라'를 읽는 순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두 소녀가 갠지스처럼 보이는 강가에 있습니다.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면 적은 것으로도 많은 것을 이룰 수도 있다는 '주가드'를 읽는다면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책을 읽지만 두꺼운 책을 몇 번이고 읽기는 힘이 듭니다. 읽어야 할 책은 너무나도 많고 사실 읽고나서 기억나지 않은 책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나마 독후감을 쓰거나 짧은 단상을 쓴 것들은 기억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와 너무 많은 기록들이 우리의 일상을 짓누르고 있으니까요. 그럴 때 나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고요하게 편안히 그림을 보고 글을 읽고 책을 덮으면 책장이 넘어가는 동안의 그 빈 공간으로 상상의 시간이 들어오니까요. 이제 한국의 그림책 작가가 세계적인 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아주 어렵게 작업해서 얻은 그림책이 저작권 문제로 오랫동안 작가가 고생한 걸로 압니다. 그래도 이전에 그림책 작업을 위해 만들었던 작품들을 보관할 곳이 없어 모두 부수거나 없애버렸던 작가들에 비해 이젠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림책 작가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자주 그림책을 봐야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림책 읽기를 권해봅니다. 유리 슐레비츠의 '비밀의 방'에서처럼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