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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May 22. 2024

턱을 넘다

생각하는 우체통

     운전을 처음 배우고 두 달쯤 지났을 때 나는 작은 접촉 사고를 냈다. 오르막의 좁은 길에서 내려오는 차와 대치하던 내가 뒤로 후진하다 뒤차의 범퍼를 살짝 부딪친 거였다. 그 후로 그 길을 한동안 가지 못했다.  길을 가다가 넘어졌던 곳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넘어진 곳을 피해서 가게 된다. 사람을 사귈 대도 마찬가지였다. 상처를 받고나서는 무람없이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은 경계하게 된다. 마음속에 턱이 하나 만들어진 것과 같다. 그걸 넘는 건 오랜 시간이 흘러야 가능했다. 물리적인 턱이 없어도 마음에 생긴 턱이 늘 망설임을, 주저함을 초래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 무턱대고 좋아하고 먼저 다가가고 하는 걸 그만 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도 주춤거리며 오랜 시간 살펴보게 된다. 상처받을 일도 없고 상처 줄 일도 없다. 코로나로 사람간 접촉이 줄어들면서 그런 현상은 고착화된 거 같다. 중요한 건 그게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는 거였다.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도 사람들을 만날 때 마스크를 쓰는 것도. 친구들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집에 사람을 들일 일이 줄어들었고 갑자기 찾아가거나 찾아오는 게 무례함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잠깐 만나서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것 같고 집에 들어오면 한동안 멍하게 있는 시간이 필요해졌다. 처음엔 나만 그런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인 증세를 표현했다. 


  삶의 공간이 바뀌고 다시 이전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고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으면서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거나 유튜브 시청으로 시간을 보내는 나를 발견했다. 공간이 바뀌면 시간도 다르게 흐르고 다른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걸 잊은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자동차 사고를 일으킨 그 구역을 다시는 가지 못했던 것처럼, 내가 걸려 넘어진 턱을 둘러서 가는 것처럼. 내게 상처 준 사람들을 다시는 보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해가 뜨고 달이 뜨고를 반복했다. 그제야 큰일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의미한 시간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낡아가는 것은 마음부터라고 늘 말하지 않았던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시작했고 어떤 일은 마무리가 되었으며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들고 했는데도 순간적으로 턱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 거였다.


  줄리안 무어의 몇 년 전 영화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을 봤다. 미셸 윌리엄스가 분한 '이자벨'은 인도에서 아동재단을 운영한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는 이자벨은 미국의 거대 기업의 스폰을 받고자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제안(뉴욕에 이자벨이 직접 와야한다는)을 거절하려 한다. 그러나 거액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뉴욕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주해야 하는 사건, 20여년 전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입양보냈던 딸 아이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 일이었다. 20여년 전 이자벨은 어린 나이에 '오스카'와 사랑에 빠져 덜컥 임신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두 사람은 아이를 입양보내기로 결정하고 도망치듯 인도로 떠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오스카는 딸 '그레이스'를 포기하지 못하고 혼자 양육하다 이자벨의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던 기업의 ceo인 '테레사'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두 어린 아이를 위해 이자벨을 인도로부터 불러들인 테레사의 선택, 그리고 인도로 돌아가 어렵게 재단을 운영할 것인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버린 딸 그레이스와 테레사의 어린 아이들을 위해 뉴욕에 남을지 결정해야 하는 이자벨, 결국 이자벨은 뉴욕에 남기로 결정한다. 

  "우리가 세상을 지나가는 걸까,

    세상이 우릴 지나치는 걸까."

  영화에서 '테레사'가 마지막 생일 파티에서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말한 이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이자벨에게 과거에 아이를 버린 잘못이 인도에서 다른 아이를 위해 헌신한다고 해서 덮일 것이냐는 테레사의 말은 이자벨에게 잔인하게 꽂힌다. 내 앞에 놓여진 숙제를 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결국 그 숙제를 풀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인데. 턱 앞에서 넘지도 망설이지도 못하고 서 있는 내게 너무 많은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매번, 내게 숙제처럼 주어지는 삶의 문제들을 앞에 두고 피해가려고만 했던 것이 어느 날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밀려올 때 그제야 내가 속절없이 보낸 시간이 미안했다. 결국은 언젠가는 마주하게 되어야 할 턱들인데. 이젠 그 턱을 넘으려고 한다. 넘고 나면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고. 그냥 숨을 크게 쉬고 발걸음을 떼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렇게 턱을 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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