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나를 용감한 아줌마로 만들 때

9만원으로 2주를 살기 위한 전략 소비

by Helena J

어느 날 문득 싱크대 앞에 서서 깨달았다. 예민하고 고왔던 나의 '아가씨 시절'은 저 거대한 새의 가죽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징그러움과 용기 사이


"으으..."

싱크대 물소리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온다. 내 앞에는 지금, 닭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거대한 생명체가 누워 있다. 오록볼록하고 미끌거리는, 생소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 촉감. 예전 같으면 비명부터 지르고 뒷걸음질 쳤을 이 덩어리를, 나는 지금 맨손으로 구석구석 씻기고 있다.

이 촉감에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배고픔이라는 본능이 징그러움이라는 감정을 이겨버린 것일까. 벅벅 터키를 닦아내고 있는 내 투박한 손을 보며 혼잣말을 뱉는다.


"삶이... 저를 참 용감하게 만든 것 같아요."


아줌마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징그러운 것들로부터 가족의 식탁을 지켜내야 하는 비장한 용기를 매일 아침 수령하는 일.


마트라는 전쟁터에서의 고독한 결단


이 사투의 시작은 며칠 전 마트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터키들 앞에서 나는 망부석이 되었다. 60불이 훌쩍 넘는 가격표와 내 몸집만 한 덩치.


'저걸 언제 다 요리해? 애물단지가 되면 어쩌지?'


머릿속 계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해야 돼? 말아야 돼? 아~~...


수없이 반복되는 내면의 갈등. 하지만 외식 한 번의 비용으로 우리 가족이 보름을 든든히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끝나는 순간, 나는 그 거대한 '숙제'를 카트에 담았다. 그것은 축제를 위한 쇼핑이 아니라, 2주간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매입'이었다.


환불 원정대와 26불의 행복


냉장고 한 칸을 통째로 점령한 터키의 위용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고든 램지가 추천했다는 비싼 사이더를 환불하기 위해서다.


마트 채소 코너에서 발견한 저렴하고 달콤한 '스위트 사이더'. 내 직감은 그게 더 완벽한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라고 속삭였다.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리쿼 스토어로 돌아가 팩을 반납하고 받은 15불의 환불금. 그 빳빳한 영수증 위에 나는 행운의 번호를 적어 넣는다.


당첨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공짜로 주어지는 그 짧은 설렘을 응모함에 쏙 밀어 넣고 나오는 길. 1불을 아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 모습이 누군가에겐 짠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 걸음걸이만큼은 당당하다. 짠내 속에도 나만의 질서와 승리가 있으니까.


탈출한 터키와 승리의 저녁


오븐 문을 열자 황금빛으로 물든 터키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이 녀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름기를 머금고 싱크대 위에서 미끄러지며 탈출을 시도하는 거대 터키!


"아들아! 도와줘! 우리 식량 도망간다!"


나의 비명에 달려온 아들과 합심해 간신히 녀석을 검거했다. 요리가 아니라 거의 격투기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땀방울을 닦으며 마주한 저녁 식탁. 그리고 나란히 늘어선 세 개의 소분 용기와 묵직한 그레이비소스 병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에필로그


누군가는 요리를 예술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사랑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오늘 터키 요리는 연말의 기분도 내면서 남은 2주의 식탁까지 든든히 채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소비 전략'이었다.


큰맘 먹고 산 식재료 하나를 알뜰하게 나누고 소분하며, 정해진 예산 안에서 최선의 효율을 뽑아냈을 때의 그 뿌듯함. 그것은 거창한 성공보다도 훨씬 달콤한 일상의 만족이다.


응모함에 넣은 그 번호표가 언제쯤 행운이 되어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늘 나는 15불의 지갑을 방어했고, 보름간의 단백질 공급망을 확보했으며, 무엇보다 징그러운 촉감을 덤덤히 이겨낼 만큼 더 단단해졌으니까.


오늘도 조금은 짠내 나지만, 내 취향과 예산을 지켜낸 나의 일상은 그래서 꽤나 살만하다.


영상으로 만나는 짠내짱양 살림기록

https://youtu.be/CzxkJMZOuKw?si=OflrYWx6Y0KKAH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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