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에 대한 기억
한창 불안하고 또 뭔가는 알 거 같다고 괜히 내 크기를 과장해 외치고 싶던 시기, 신입학생으로 온 L을 만났다.
일상에 어떤 좌절도 쉽게 뛰어넘을 것 같은 경쾌한 밝음. 발자국 소리까지 악기소리처럼 들리는 기묘했던 분위기. 아시안계 여자인 데다가 또래인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돌아보면 나는 L보다 어리면서도 꽤 선배처럼 보이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이리저리 치이고 불안했던 시기, 자연스레 품어 나오던 그녀에 환함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맘에서였을지 모른다. 그녀에게 좋음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학제 관련 질문들이나 특정 교수님에 대한 내 나름의 팁들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때 난 내 존재가 자연스레 기쁨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 잘났으면서도 서로 다 쭈글이라고 의기소침해 있었던 보스턴이란 이 평균과 동떨어진 이상한 세계는 나를 더 작아지게 했다.
L은 신기한 기분을 주는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노력해서 내어놓는 이야기들을 그녀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 귀한 셰프가 만들어준 음식인양 음미하고 고마워했다. L앞에 있으면 나는 칭찬받은 코끼리처럼 이런저런 재롱을 피웠다. 그 시간들이 우리 둘에겐 가장 서로에게 친절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 다정한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양한 관계보다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길 좋아하는 나와 세상을 다 만나고 싶어 하는 듯했던 L의 천진함은 불협화음을 냈다. 내가 어느 정도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는지 그녀는 나와의 관계에서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혹은 그때 긴장 없이 보여주던 그녀의 모습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내밀한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몇몇 모임에서 나에게 그저 관찰자의 역할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거나, 현란히 치장한 언변 뒤에 나에게 받고 싶은 도움이 실제 메시지인 경험이 반복되면서 나는 이 관계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냥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거였으면 편했을 텐데. 나를 보고 반갑게 웃던 그 마알간 얼굴에 애정어린 진심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더 혼돈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내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라는 기분에 치여사는 유학생의 삶에 이 기분을 가중하는 가까운 관계를 하나 더 가지는 것은 나에게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먼저 거절감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기억하지만 L은 아마 내가 급작스레 그녀에게 거리를 두었다고 느낄 것이다.
어쩐지 늦가을이 따뜻한 기운을 길게 허락하는 것 같던 작년 11월 어느 금요일 밤. 보통은 조용하던 학교 이메일 알림이 몇 개씩이나 울려댔다. 시차 때문에 보통은 학교에서 오는 알림 들을 꺼놓았는데 어떤 메일이길래 내 메일 필터링을 뚫고 울려대는 걸까? 이제는 아예 모든 알림을 꺼두어야 하나.
메일 불빛에 잠이 깬 나는 불길한 느낌을 외면했었다.
아침이 되어 주말 동안도 혼자 반항하듯 메일을 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월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아차 싶어 들어간 학교 메일 계정. 그리고 그 응급상황처럼 환한 알림을 울리던 그 메일을 읽으며 마음속에 무언가 중요한 끈 하나가 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미 끊어져 있었음을 알았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아무 기분도 들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L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급작스레 마련된 추모모임이 내가 메일을 읽지 않던 그 금요일에 있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학교에 마련된 추모공간에 더하기 위해 너와 찍은 사진을 찾아보고 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내가 너에게 급작스레 거리를 두었던 것에 대한 벌일까. 난 너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아무런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나는 몇 개월을 아팠다.
어떤 방법으로 너에게 안녕을 이야기해야 할까. 아직 나는 이 거대해 보이는 감정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어주던 네 그 눈길처럼, 그리고 어쩌면 내가 더 깊이 알게 된 너의 모습들을 담아두지 말고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글은 한동안 툭하면 울음으로 터져나오는 감정들을 너에게 보내는 작은 의식이자, 너의 일방적인 안녕에 대한 나의 반항이다.
그렇게 급작스레 끊긴 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렇게 여기에서 너에게 연결된 실을 만지작 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