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을 많이 가진 여자

용도에 맞는 물건을 골라 쓰는 사치

by Helen

[매거진 : 가난한 프리랜서의 소심한 사치생활]


프라이팬을 많이 가진 여자가 되고 싶어요.

학창 시절 누군가가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이렇게 답하곤 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화장실 입구에는 큰오빠가 손으로 짜 맞춘 나무 책장이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여러 책이 꽂혀 있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언니가 구독하던 「COOK」이라는 잡지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나라의 음식과 식재료, 주방용품에 대한 내용이 실린 요리 관련 월간지였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세계 각국의 풍경과 식재료, 사람들과 먹거리에 대한 사진들이 너무나 다채로워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진 속 디테일이 기억날 정도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책장 앞에 머무르며 오늘은 몇 년도 몇 월호를 볼지 고민하는 게 어린 시절 나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선택은 늘 달랐지만, 나의 애정을 독차지해서 가장 많이 간택되었던 것은 ‘프라이팬 특집’이 실린 권호였다. 프라이팬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의 레시피는 물론 프라이팬이 만들어지는 과정, 소재의 차이, 관리법에 대한 내용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프라이팬 모양의 냉장고 자석이나 브로치 같은 점토 공예품 만드는 법까지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화장실에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고작해야 열 살도 안되었던 그 시절 나는 왜 프라이팬에 꽂혔을까? 프라이팬 특집기사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 프라이팬은 모두 검은색에 동그란 모양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다양한 종류의 프라이팬이 넘쳐 나고 있었다. 특히 공장에서 프라이팬을 만드는 과정, 공방에서 수제로 최고급 청동 프라이팬을 만드는 장인의 모습이 생소하고도 흥미로웠다. 프라이팬은 용도에 따라 모양이 달랐고, 어떤 요리를 하느냐에 따라 재질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 지식과 경험의 한계, 그리고 세상의 다양성과 마주치게 된 첫 번째 계기가 그 특집기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이쯤에서 잠시 프라이팬의 종류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코팅팬이다. 예열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실패 확률이 거의 없다. 대신 코팅이 벗겨지면 유해물질이 나오기 때문에 미련 없이 교체해야 한다. 신경 써서 실리콘이나 나무 소재의 주걱을 쓰고, 설거지가 될까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수세미로 세척을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매끈하던 표면이 거칠거칠해진다. 편리한 대신 오래 함께하기는 어려운 관계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 스테인리스 팬을 쓰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스테인리스 팬은 예열과 온도 조절이 관건이라 처음에는 까다롭지만, 한 번 요령을 익히면 고기 굽는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 코팅이 없어 긁힐 걱정이 없고 관리만 잘하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다만 전분 함량이 높은 요리를 하면 눌어붙기 쉽다. 한마디로 볶음밥과는 상극이다.


코팅도 스테인리스도 아닌 팬들도 있다. 캠핑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무쇠 팬의 경우 무겁고 관리가 까다로운 편이다. 쉽게 녹이 슬기 때문에 사용 후에는 반드시 시즈닝(기름을 팬에 구워 코팅막을 만드는 과정)을 해줘야 한다. 그렇지만 길들이는 재미가 있고 한 번 달궈지면 열을 오래 품기 때문에 스테이크에 제격이다. 구리 팬이나 탄소강 팬은 열전도율이 뛰어나 전문셰프들이 선호한다. 다만 가격과 관리의 허들이 높다.

<무쇠팬의 대명사 LODGE 형제들. 우리 집 프라이팬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내 취향의 다양한 프라이팬을 주방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랑하듯 걸어 놓고 싶었다. 볶음밥을 해 먹는 날에는 열을 빠르게 전달하는 탄소강 웍을 선택하고, 콘치즈가 먹고 싶은 날에는 무쇠로 된 스킬렛을 꺼내 쓰고 싶었다. 생선은 살이 부서지지 않게 타원형 피시 팬에 굽고, 팬에 남은 소스를 활용해야 할 요리는 바닥이 두툼한 스테인리스 팬을 골라 팬을 다루는 능숙한 솜씨를 뽐내고도 싶었다. 소박한 듯 보이지만 참 사치스러운 꿈이다.


나이가 들어 캠핑과 주방도구를 좋아하는 남편을 만났고 그 덕에 지금 내가 가진 프라이팬은 전문 셰프들 못지않게 많다. 그런데 이제는 프라이팬을 많이 갖고 있더라도 주방이 넓지 않으면 처치곤란이 된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많은 프라이팬을 두려면 집과 주방이 넓어야 한다!) 게다가 아무리 프라이팬이 많아도 막상 사용하는 팬은 한두 개에 그치고 있으니 2:8의 법칙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도 확인해 버렸다. 수십 개의 프라이팬을 가지고 있다 한들 실제로 내가 하는 요리의 80%는 늘 그중 20%도 안 되는 몇 개의 프라이팬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나머지 팬들은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제는 아무도 나에게 어떻게 살고 싶냐, 꿈이 뭐냐 묻지 않는다. 그러니 더 이상 프라이팬 이야기를 꺼낼 일도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용도에 맞는 물건을 선택하는 사치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프라이팬보다는 가볍고 자리를 덜 차지하는 물건들로 어린 시절 꿈을 소심하게 대체한다.


홍차를 마실 때에는 통짜 몸매를 자랑하는 머그잔이 아니라 잔잔한 꽃무늬가 그려진 얄상스러운 홍차 잔에 마신다. 그러면 잠시나마 지브리 영화 속에 나오는 품위 있는 영국 귀부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파스타는 무늬가 드러나지 않는 우윳빛 파스타 접시에 담아야 나폴리로의 순간 이동이 가능하다. 공동주택에서 생선을 굽는 것이 쉽지 않지만, 가끔 큰맘 먹고 꽁치를 구워 먹는 날에는 무를 갈아 곁들이며 잠깐 일본 여행을 다녀온 기분도 즐긴다. 그릇 하나, 도구 하나가 식탁 위의 국경을 넘게 해 주기도 한다.


가난한 프리랜서가 된 지금의 나는 프라이팬을 더 늘리기보다는, 이미 가진 것 중에서 무엇을 계속 쓰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고민하는 쪽에 가깝다. 많이 가지는 삶이 아니라, 고를 수 있는 삶에 대한 욕망. 프라이팬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지만, 취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만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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