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옷을 입는다는 것의 예의
최근 교복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문득 까마득한 옛 기억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의 '교복 자율화'에 대한 추억이다.
당시 학교는 학생 지도 문제로 고민이 많았는지, 변화관리 차원에서 우선 매주 토요일만 자유복을 허용하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어떤 선생님은 토요일마다 학생들을 한 명씩 모델처럼 일으켜 세워 복장을 체크해 주기도 하셨는데, 그 시간이 꽤 설레고 재미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과거의 디테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학력고사 점수가 몇 점이었는지, 첫 월급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 내가 '교복 자율화는 중학교 때였다'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데에는 확실한 장면 하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어느 토요일이었다. 직장인이던 큰언니가 거래처 사장님께 공연 티켓을 받았다며 세종문화회관에 같이 가자고 했다. 학교에 입고 갔던 옷차림 그대로 언니를 따라나섰다.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이 연주하는 '엘 빔보(El Bimbo)'와 '헝가리 무곡 5번(Hungarian Dance No. 5)'에 흠뻑 빠져들었던 그날의 공기. 그 강렬한 음악적 체험 덕분에 내 머릿속엔 '교복 자율화=중학생 시절'이라는 기억이 머릿속 장기기억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학교에 입고 갔던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이 아니라, 그 공간에 어울리는 조금 더 격식 있는 옷을 입고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뒤늦은 부끄러움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교복을 활동적인 간편복으로 바꾸는 변화에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한 가지 보완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TPO(Time, Place, Occasion)'에 대한 감각이다.
오래전 모델 김동수 님이 EBS 강의에서 들려준 일화가 무척 인상 깊었다. 아들인 안드레 진(럭비 선수)이 어릴 적 친구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의 이야기다. 김동수 님은 아들에게 편안한 라운드 티셔츠를 입혀 보내려 했는데, 외국인 남편이 깜짝 놀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아무리 친구들끼리의 모임이라도 '생일'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자리라면, 최소한 '깃(Collar)'이 있는 옷을 갖춰 입히는 것이 예의라는 이유였다.
"그저 편하면 됐지, 깃 하나 있고 없고가 뭐 그리 대수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상황과 장소에 맞춰 옷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회적 소통의 기본을 익히는 과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편한 게 최고'라는 실용주의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는 경향이 있다. 해외여행지에서 흔히 마주치는 한국인의 등산복 차림이 그 단면일지도 모른다. 물론 편안함은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상대방과 그 자리를 위해 기꺼이 '멋'을 부리고 예의를 갖추는 법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교복이 편해지는 만큼, 학교와 가정에서 복장이 갖는 사회적 언어를 가르치는 일도 함께 이루어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