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리틀 미스 선샤인

흔들려도 빛나는 사람들

by Helia

노란 밴 하나가 오래된 내 상처를 끌고 달렸다. 처음 <리틀 미스 선샤인>을 보던 그날, 스크린 한가운데에서 기웃거리던 그 차가 이상하게도 나를 오래 붙잡았다. 덜컹거리고, 숨이 차서 멈추고, 다시 밀려 겨우 전진하는 모습이 꼭 과거의 나를 닮아 있었다. 누구에게도 환하게 웃어 보이지 못한 시절의 나, 작은 실패에도 뒷걸음치던 나, 사랑받는 법을 잊어버린 채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던 나. 노란색이라는 밝은 껍데기를 두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초라해 보이는 그 밴은, 내 오래된 마음의 잔상처럼 흔들렸다. 나는 그 흔들림을 따라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잊고 지냈던 나의 이야기를 마주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비슷한 모양으로 주어지는 것 같지만, 이 영화는 그 환상을 가장 먼저 깨부순다. 화면 속 가족은 도저히 서로의 결을 맞출 수 없는 모래알 같은 존재들로 가득하다. 아버지는 성공만을 외치는 피곤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그 중간에서 부서지지 않기 위해 몸을 지탱하는 사람이며, 삼촌은 절망에서 허우적거리고, 오빠는 말조차 거부한 채 자기 안의 어둠과 대치한다. 할아버지는 투박하고 고집스럽고, 때로는 괴팍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올리브가 있다. 티 없는 눈망울로 가족의 균열을 바라보는 아이. 이 가족은 다들 뒤틀려 있지만, 그 뒤틀림 덕분에 오히려 서로를 잡아주는 기묘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런 장면들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완벽함이 꼭 가족을 가족답게 만드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서로의 빈틈이 보일 때에야 비로소 다가갈 수 있고, 서로의 엉망진창을 목격할 때에야 진짜로 손을 내밀 수 있다.

올리브는 작은 소녀다. 화려하지 않고,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경쟁력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가장 간절한 종류의 용기를 보았다.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는 용기. 상처받으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힘.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려고 자기를 깎아내는 대신, 자신의 리듬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는 굳은 심지 같은 것. 올리브가 미인대회 무대를 바라보던 장면에서, 나는 이상하리만치 오래 멈춰 있었다. 저 아이는 저 빛나는 무대가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서고 싶어 한다.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보고 싶어 한다. 나는 그 모습에서 오래 전의 나를 보았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지 못해 늘 뒤처졌다고 느끼던 날들,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일까’ 고민하며 발끝만 바라보던 순간들. 올리브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흔들려도 괜찮아. 네가 원하는 무대에 서 보면 돼.”

가족이 모두 함께 차를 밀어서 다시 출발시키던 장면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박혀 있다. 실패가 겹겹이 쌓여 숨조차 쉬기 어려웠던 시절의 나에게 그 장면은 마치 오래 잊힌 구조 신호처럼 느껴졌다. 실패는 누구를 가리지 않는다. 삶의 어느 순간에는 모두 엇박자로 춤을 추고, 기대고 싶을 때 기대지 못하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한다. 그러나 이 가족은 멈춰버린 차를 보고 포기하지 않았다. 뒷부분에 손바닥을 붙이고, 온몸으로 밀어붙여 다시 달리게 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고였다. 나도 내 삶을 그렇게 밀어준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면 혼자서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밀어야 했던 적이 훨씬 많았을까?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중요한 건 멈췄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 다시 굴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한 명만이라도 옆에 있으면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할아버지의 존재는 작은 돌멩이처럼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거칠고 거센 말투, 욕설로 가득한 대사, 다정해 보이지 않는 태도. 하지만 올리브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너답게 살아라’라는 말로 아이의 심장을 단단히 붙잡아 준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숨이 걸리는 듯했다. 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너무 늦게 하게 될까? 왜 어른이 되면 될수록 더 많이 포기하고 더 많이 주눅 들게 되는 걸까? 할아버지의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올리브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해 주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언은 사람의 인생을 구해내기도 한다. 나 역시 그 말을 오래 기다려 왔던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서 들을 수 없다면, 이제는 내가 내게 말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너답게 해라. 그걸로 충분하다.”

영화의 후반부, 올리브가 무대 위에서 마음껏 춤을 출 때, 나는 웃다가 울고 울다가 다시 웃었다. 그 춤은 완벽하지 않고, 우아하지도 않고, 전문가의 춤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춤만큼 진실한 몸짓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잠시 벗어던지고, 자신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리듬에 몸을 맡기는 순간.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빛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동안 지켜야만 했던 체면, 누군가의 시선, 실패하면 부끄럽다는 강박이 한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올리브의 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흔들리는 그 순간에도 너는 살아 있다. 너의 엉망인 순간에도 너는 빛난다.”

그리고 가족이 무대로 뛰어들어 함께 춤을 출 때, 그 장면은 코미디로만 보기에는 너무 진했다. 마치 서로를 향한 모든 감정들이 폭발하는 작은 축제 같았다. 그들은 실패의 조각들을 하나씩 들고 무대 중앙으로 모여들어 거대한 하나의 ‘괜찮음’을 완성했다. 나는 그때 마음속에서 묵직한 문장 하나가 일어나는 걸 느꼈다. “가족은 완벽한 순간이 아니라 추한 순간에 드러난다.” 그 문장은 지금도 나를 지탱한다. 우리는 서로 잘난 모습만 보여줘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는 정확히 그 반대를 말한다. 부끄러운 순간일수록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고. 실패했을 때일수록 등을 내어주어야 한다고. 그게 인간이 서로에게 건네는 가장 아름다운 위로라고.

노란 밴은 결국 우리의 초상이다. 덜컹거리고, 멈추고, 다시 굴러가고, 그 안에서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조용히 견딘다. 삶은 대개 이런 모습이다. 완벽한 속도로 달리는 날보다 멈추는 날이 더 많고, 활짝 웃는 순간보다 입술을 깨물며 버티는 시간이 더 길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우리를 어른으로, 혹은 다시 아이로 만들어 준다. 영화는 차갑지 않은 방식으로 묻는다. “너의 속도는 무엇이니? 너를 움직이게 하는 건 무엇이니?” 나는 지금도 그 질문을 손바닥에 얹어 조용히 바라본다. 답은 매번 다르지만, 그 질문 자체가 나를 다시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 되는 날도 있다.

영화는 결국 하나의 메시지를 남긴다. 우리는 누구나 엉망인 춤을 춰야 비로소 살아 있게 된다. 흔들리고 부딪히고, 어떤 날에는 우스꽝스러워도 괜찮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웃든 울든, 꾸든 비틀거리든, 몸을 움직이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존엄이다. 올리브가 보여준 것이 그것이었다. 누군가의 기준에 들지 않아도 되는 생의 춤. 평가받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들. 나답게 흔들릴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이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내 안에서 아주 작은 노란 불빛이 깜박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 어둠 속에서 찾았던 손전등을 다시 켠 것처럼. 그 빛은 아주 희미했지만, 확실히 내 삶의 방향을 어딘가로 이끌고 있었다. “다시 굴러가도 돼.” “너의 속도로 와도 괜찮아.” “흔들려도, 넘어져도, 너는 이미 너의 무대 위의 햇빛이다.”
그리고 그 말들은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내 마음 안에서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