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장|시가 될 이야기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들에 대하여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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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heures persanes: No.13, La rose dans la nuit


어쩌면 당신에게도 있을지 모른다. 아직 시가 아니라고, 그래서 끝내 말하지 못한 이야기 하나쯤. 적으려다 멈추고, 말하려다 삼킨 문장.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형태를 미룬 채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 곁에서 오래 머문다. 시가 되기에는 아직 숨이 가쁘고, 이야기라 부르기에는 너무 조용한 말들. 그 애매한 온도 속에서 하루를 견디는 문장들이 있다.

시가 될 이야기는 늘 사소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놓쳐버린 버스 한 대, 유난히 늦게 식은 커피, 서랍 깊숙이 밀려 있던 영수증 하나.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은 장면이 어떤 날에는 유독 발목을 붙잡는다. 지나치려다 멈추고, 잊으려다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순간. 이유를 묻는 순간, 그 이야기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설명하려 들수록 말은 흐려지고, 붙잡지 않을수록 감각은 선명해진다. 그때서야 알게 된다. 이건 시가 되기 전의 이야기라는 걸.

이야기는 시간을 따라 걷지만, 시는 시간을 접는다. 이야기가 하루의 처음과 끝을 잇는 길이라면, 시는 그 길 위에 고인 물이다. 잠시 멈춰 서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 시가 될 이야기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지나쳐도 괜찮고, 돌아봐도 괜찮은 자리. 하지만 나는 자주 망설인다. 오래 서 있으면 하루가 늦어질 것 같고, 그냥 지나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밤이 되면 그런 이야기들은 조금 더 가까워진다. 낮에는 모든 것이 너무 또렷해서 말들이 서로를 가리고 서 있다. 밤이 오면 사물은 색을 덜어내고, 마음은 틈을 얻는다. 불 꺼진 방에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문장 하나. 정확하지 않아도 괜찮고, 끝맺지 않아도 되는 말. 지금 적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지만, 급히 적을수록 도망치는 말. 시가 될 이야기는 늘 그렇게 사람을 시험한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함부로 완성하지 않으려 한다. 아직 살아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상태, 이름 붙이기 어려운 마음. 그것을 성급히 문장으로 고정시키는 건 숨 쉬는 것을 유리병에 가두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메모로만 남긴다. 단어 몇 개, 문장 하나, 혹은 날짜 하나. 그 사이에서 이야기는 스스로의 속도로 시를 향해 걸어간다.
기억은 시가 될 이야기가 가장 자주 머무는 곳이다. 오래전의 일인데도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 이름이 흐릿해진 사람의 목소리, 그때 왜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뒤늦은 질문. 기억은 원래 분명한 서사를 갖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살이 빠진다. 사건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는다. 그 순간, 기억은 이야기를 벗고 시의 옷을 입는다. 같은 기억인데도 어느 날은 길게 설명해야 하고, 어느 날은 한 줄이면 충분해지는 이유다.

어떤 이야기는 끝을 싫어한다. 마침표보다 쉼표를 좋아하고, 단정적인 말보다 여운을 택한다. 예전의 나는 끝맺지 않으면 불안했다. 결론 없는 글은 미완성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가 될 이야기들은 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것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은 날들이 있다는 걸 가르쳐준다. 이제는 안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완성되는 이야기들도 있다는 것을.

시가 될 이야기는 읽히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견디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혼자 품고 있을 때 더 빛난다. 그렇다고 공유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순간은 조회수나 반응과는 다른 곳에 있다. 누군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 혹은 자신의 마음을 슬쩍 겹쳐 놓을 때, 그때 비로소 이야기는 제 역할을 다한다.

나는 여전히 시가 될 이야기들 속에서 살고 있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 말보다 숨이 앞서는 순간들. 그것들을 억지로 시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잘 살아 보내기로 했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시가 될 때까지, 이야기가 스스로의 언어를 찾을 때까지. 오늘도 한 줄의 문장을 적어두고 조용히 덮는다. 아직은 이야기라고, 하지만 분명 시를 향하고 있다고. 아직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 하나쯤, 당신에게도 있기를 바란다. 지금은 이야기로 남아 있어도 괜찮다. 시는, 결국, 언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