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장|한 뼘의 여백

숨이 머무는 자리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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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for Piano with Slow Motion


요즘 왜 이렇게 바쁜데도 허전한지 모르겠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지친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아마 삶에서 가장 필요한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더 채우려 애쓰며 살아간다. 일정표의 빈칸은 불안으로 보이고, 아무 약속 없는 저녁은 실패처럼 느껴진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비워 두면 사라질 것 같아서 손에 쥔 것들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한다. 하지만 가득 찬 하루의 끝에서 남는 것이 피로뿐이라면, 그때는 방향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숨이 차다는 건, 이미 너무 많이 채웠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여백은 공허와 다르다. 텅 빈 상태가 아니라, 아직 말해지지 않은 감정과 미처 도착하지 않은 생각이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다. 글의 여백은 문장을 끊어놓지만 이야기를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음악의 쉼표는 소리를 비우지만, 곡의 호흡을 만든다. 삶도 그러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간,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는 태도 속에서 오히려 마음은 제 속도로 돌아온다. 여백이 사라진 삶은 소음으로 가득 차고, 속도만 남은 하루는 방향을 잃는다.

나는 한동안 여백을 견디지 못했다. 비어 있는 시간이 생기면 괜히 휴대폰을 들여다봤고, 일정이 없으면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몰아붙였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답할 말이 없으면, 내가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채웠다.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적고, 내일의 나를 몰아세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애쓴 날들이 지나가고 나면, 손에 남은 건 성취가 아니라 소진이었다. 열심히 살았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었지만, 잘 살았다는 말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여백을 처음 의식한 날은, 의도하지 않은 멈춤의 순간이었다. 약속은 취소됐고, 해야 할 일도 미뤄졌다. 하루가 통째로 비워진 채 내 앞에 놓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창가에 앉아 시간을 바라봤다. 시계 초침은 평소보다 크게 들렸고, 햇빛은 바닥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 사이에 아무 역할도 맡지 않은 내가 있었다. 처음엔 불안이 밀려왔다. 이렇게 시간을 써도 되는 걸까, 오늘을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은 걸까. 그런데 잠시 후, 설명하기 어려운 평온이 따라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백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한 뼘의 여백은 회피가 아니다. 미루거나 도망치는 태도와는 다르다. 오히려 정확히 마주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선택이다. 숨을 고르지 않고서는 오래 달릴 수 없듯,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방향을 정할 수 없다. 여백은 다음 움직임을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준비 시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가는 길이 맞는지, 이 속도가 나에게 적절한지, 꼭 붙들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답을 서두르지 않을 때, 질문은 더 정직해진다.

사람 사이에서도 여백은 필요하다.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다. 모든 시간을 함께하려 들고, 모든 마음을 들여다보려 할 때 관계는 숨이 막힌다. 적당한 거리는 무관심이 아니라 존중이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은 충분한 여백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 틈이 있기에 다시 다가갈 수 있고, 그 거리 덕분에 그리움이 생긴다. 여백 없는 친밀함은 쉽게 닳아버리지만, 여백이 있는 관계는 오래도록 윤기를 유지한다.
속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빠름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여백은 종종 느림으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깊어짐이다. 서두르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고, 멈춰 설 때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여백을 허락한 하루는 편안하기만 한 하루가 아니라, 마음이 정렬되는 하루다. 겉보기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아도, 내면에서는 접히고 풀리며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글을 쓸 때도 여백은 중요하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들수록 문장은 무거워지고, 다 말하려 할수록 의미는 흐려진다. 여백을 남겨두면 독자는 그 자리를 자신의 기억과 감정으로 채운다. 말하지 않은 문장들이 오히려 오래 남아 마음속에서 울린다. 삶 역시 그렇다. 모든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고, 모든 하루를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 여백이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여백은 용기다.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자신에게 말해주는 용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뎌내는 용기다. 이 용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하지만 한 번 익숙해지면, 여백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필요한 순간에 방향을 알려준다. 멈춰 서서 바라본 풍경은, 달리면서는 결코 볼 수 없던 얼굴을 하고 있다.

요즘 나는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긴다. 하루의 끝에 아무 계획도 적지 않은 시간을 두고, 마음속 문장 사이에 쉼표를 찍는다. 모든 질문에 즉답하지 않고, 모든 감정에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렇게 남겨진 한 뼘의 공간에서 삶은 조금씩 제 모양을 찾아간다. 가득 채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사실, 비워 두었기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결국 한 뼘의 여백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에서, 더 잘 살아내려는 마음으로 옮겨가는 작은 전환이다. 채우지 못한 하루는 실패가 아니다. 숨이 머무는 자리다. 오늘도 완벽하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면, 그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남겨둔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 한 뼘의 여백 속에서, 내일의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