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아니라, 말이 비워놓은 자리
아무리 먹어도 허기진 날이 있다. 배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비어버린 것 같은 날. 접시 위의 음식은 차곡차곡 사라지는데 속은 끝내 채워지지 않는다. 씹고 삼키는 동안만 잠잠해질 뿐, 숟가락을 내려놓는 순간 다시 허기가 고개를 든다. 나는 한동안 이 허기가 단순한 공복이라 믿었다. 위장이 예민해졌다고,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허기는 늘 같은 시간에 오지 않았다. 유독 당신의 말이 지나간 뒤, 하루의 끝에서 혼자가 되었을 때, 그때마다 배는 가장 먼저 울렸다.
누가 그러더라. 서글픔의 대명사는 허기짐이라고. 마음 안에 남은 말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켜 있으면, 그 응어리가 몸을 통해 먼저 신호를 보낸다고. 그 말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았다. 허기는 음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빠져나간 무언가의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배가 고플 때마다 잠시 멈춰 서게 되었다. 이 허기가 정말 밥의 문제인지, 아니면 마음의 문제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서글픔은 늘 조용한 얼굴을 하고 온다. 울음도, 분노도 없이 아주 사소한 틈으로 스며든다. 눈을 맞추지 않은 인사, 건조하게 정리된 문장, 괜찮냐는 질문 대신 던져진 결론 같은 말. 그런 것들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아서 더 오래 남는다. 아프다고 말할 틈도 없이 마음 한쪽을 비워두고 가버린다. 처음엔 잘 모른다. 웃을 수 있고, 하루를 견딜 수 있고,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서글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약한 곳을 찾아 몸으로 내려앉는다.
그래서 말인데, 내 허기짐은 당신 때문인 것 같다. 당신은 늘 틀린 말을 하진 않았다. 다만 사람을 살리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온기 없이 툭 내뱉어진 말들은 김 빠진 국처럼 식어 있었고, 나는 그릇만 남은 식탁 앞에 혼자 오래 앉아 있었다. 이해하려는 몸짓 없이 던져진 말, 이미 결론이 난 문장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삼키지 못한 말들은 마음속에서 맴돌다 응어리가 되었고, 그 응어리는 허기로 변해 몸에 남았다.
사람은 말로 상처받고, 말로 버틴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건네느냐에 따라 마음의 온도는 달라진다. 당신의 말은 늘 정확했지만 차가웠다. 반박할 수 없어서 더 깊이 삼켜야 했고, 삼킨 말들은 제때 흘러가지 못한 채 쌓였다. 배가 고픈 날이면 괜히 당신의 말투가 떠올랐다. 그때의 표정과 공기가 함께 되살아났다. 허기는 그렇게 기억을 데리고 왔다.
허기는 참 솔직한 감각이다. 숨길 수도, 미룰 수도 없다. 마음이 울지 못한 대신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배는 제때 울린다. 그래서 나는 허기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필요한 건 음식일까, 아니면 다정한 말 한마디일까. 따뜻한 국물보다 필요한 건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묻는 목소리는 아닐까. 그렇게 묻고 나면, 허기는 조금 다른 얼굴로 보인다.
어릴 적의 배고픔은 단순했다. 뛰어놀다 보면 배가 고팠고, 밥을 먹으면 해결됐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의 허기는 다르다. 충분히 먹어도 가시지 않고, 잘 챙겨 먹을수록 더 또렷해지기도 한다. 그 허기는 대개 외면받은 마음, 닿지 못한 기대, 말해지지 못한 감정에서 시작된다.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당신의 반응, 바라지 말았어야 할 온기, 괜찮을 거라 스스로를 속였던 순간들이 겹쳐 허기로 남은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한동안 나를 탓했다.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고, 괜히 의미를 부여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지 못해서 이런 허기가 생긴 거라고. 그래서 더 먹었다. 허기를 잠재우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마음을 달래고 싶었던 거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음식 사이에서 빠져나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서글픔은 그렇게 결핍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사랑의 결핍, 관심의 결핍, 존중받지 못했다는 감각의 결핍. 그리고 허기는 그 결핍이 몸으로 드러난 형태다. 그러니 허기진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많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많이 참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당신은 아마 모를 것이다.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얼마나 비워놓는지. 말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마음에는 분명한 무게로 남는다. 어떤 말은 등을 토닥이듯 남고, 어떤 말은 식은 공기처럼 스친다. 당신의 말은 늘 후자였다. 스쳐 지나갔지만, 지나간 자리에는 온기가 남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나는 음식으로 채우려 했고, 그래서 더 허기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왜 그토록 자주 배가 고팠는지, 왜 혼자 있는 밤마다 배가 먼저 울었는지.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찾고 있었던 거다. 이해받고 싶었던 마음, 따뜻하게 불러주길 바랐던 이름, 괜찮다고 말해줄 누군가의 목소리. 그런 것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나는 허기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배가 고프면 무작정 먹기보다 잠시 멈춘다. 이 허기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말에서 시작됐는지, 무엇이 빠져나갔는지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서글픔이 허기로 변해 나온 것뿐이라고.
허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배고픈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나를 굶긴 말들이 문제였다는 걸. 온기 없이 던져진 말들이 마음을 비워놓았다는 걸. 언젠가 누군가의 말이 따뜻해지고, 그 온기가 자연스럽게 머무는 날이 오면, 이 허기도 조금은 잦아들지 모른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이 허기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허기는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니까. 서글픔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