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사랑은 이제 그만
나는 사랑을 시작할 때마다 지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먼저 마음을 숨겼고, 더 좋아하는 쪽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답장이 늦게 오면 아무렇지 않은 척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보고 싶다는 말 대신 바쁘다는 핑계를 먼저 찾았다. 이상하게도 사랑은 늘 그렇게 시작됐다. 설렘보다 계산이 앞섰고, 기대보다 방어가 앞섰다. 『사랑을 시작하는 우리에게』를 읽으며 나는 그 낡은 습관을 들킨 사람처럼 오래 멈춰 있었다. 이 책은 사랑을 예쁘게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시작 앞에서 망설이는 우리의 속내를 조용히 끌어낸다.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 사람들은 종종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안는다. 잘되고 싶은 마음과 다치고 싶지 않은 마음. 나는 늘 후자에 더 가까웠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덜 표현했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를 줄였다. 그게 현명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책은 묻는다. 그렇게 해서 정말 덜 아팠느냐고.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숨기느라 더 지쳤고, 괜찮은 척하느라 더 메말랐다. 사랑은 상대를 향해 열리는 문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나를 향해 열리는 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사랑은 상대를 얻는 일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몇 번의 연애를 동시에 떠올렸다. 그는 표현이 적었고, 나는 서운했다. 그러나 서운하다는 말을 끝내 삼켰다. 괜히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혹은 더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렇게 모서리를 숨기다 보니, 결국 나는 둥글지도 못한 채 닳아갔다. 이 책은 그런 나를 탓하지 않는다. 대신 말한다. 사랑이 두려운 이유는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내가 드러나는 게 무서워서일지도 모른다고.
상처 많은 사람의 연애는 유난히 조심스럽다. 한 번 무너진 경험이 있으면, 다음번에는 더 단단히 잠근다. 나 역시 그랬다. 누군가 다정하게 다가와도, 나는 속으로 거리를 계산했다. 어디까지 허용할지, 어디서 멈출지 선을 그었다. 그 선이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사랑을 시작하는 우리에게』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선을 그을수록 관계는 얕아지고, 얕은 관계는 쉽게 흔들린다고. 깊어지려면 결국 한 번은 발을 적셔야 한다고. 젖지 않겠다고 버티는 동안, 나는 이미 물가에서 혼자 떨고 있었다.
이 책이 특히 와닿았던 건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멈칫’을 다루는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망설이는 자신을 겁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멈칫 이 나를 보호해 온 시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충분히 아팠기 때문에, 함부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스스로를 조금 덜 몰아붙이게 되었다. 왜 이렇게 소심하냐고, 왜 또 계산하냐고 자책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사실은 나를 지키려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는, 지키는 법을 조금 바꿔야 할 때라는 걸 알게 됐다.
연애가 힘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시험처럼 여긴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표현해야 적당한지, 얼마나 기다려야 멋있는지, 어느 타이밍에 밀당해야 하는지. 나도 그 시험지 위에서 늘 답을 고르듯 행동했다. 하지만 사랑은 객관식이 아니었다. 틀릴까 봐 찍지 못한 문항들이 결국 후회로 남았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순간, 이미 나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 문장은 나를 무너뜨리면서도 동시에 가볍게 했다. 어차피 숨겨도 티가 나는 마음이라면, 차라리 솔직해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 책은 사랑을 오래가는 기술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균열들을 보여준다. 질투, 불안, 기대, 집착, 외로움. 그 감정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연애를 하면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나는 늘 덜 성숙한 나를 감추느라 애썼다. 그런데 이 책은 말한다. 흔들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중요한 건 흔들림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그 말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이제야 알겠다. 사랑은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는 걸. 덜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전략도, 상처를 최소화하는 기술도 결국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사랑은 누군가를 얻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나를 숨기지 않는 연습에 가깝다. 물론 여전히 두렵다. 답장이 늦으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감정이 나를 이상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걸.
『사랑을 시작하는 우리에게』는 거창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사랑이 두렵다면, 그 두려움까지 안고 시작하라고. 완벽해진 뒤에 시작하겠다는 약속은 결국 영원히 미뤄질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오래 생각했다. 사랑을 미루는 동안,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더 단단해진 나? 더 쿨해진 나?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조금은 불안한 채로 누군가를 만나게 될 테니까.
그래도 나는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 이번에는 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겠다. 덜 좋아하는 척하지 않겠다.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겠다. 혹시 상처를 받더라도, 적어도 숨지는 않겠다. 사랑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 솔직함이야말로 진짜 시작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