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울컥하는 마음이 다 말이 되기 전엔

음악이 먼저 알아차리는 감정

by Helia

추천곡: Sergei Rachmaninoff –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햇빛은 여름의 문턱 앞에서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커피가 식는 속도보다 더 느리게, 그 곡을 다시 재생했다.
라흐마니노프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
아주 오래전에 처음 들었지만,
어느 시기엔 일부러 듣지 않았던 곡.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자꾸 이 곡으로 돌아가는 게
어쩐지 스스로를 너무 드러내는 일 같아서.

그러나 오늘은, 괜찮았다.
어느 날엔 아무렇지 않게 건너뛰던 첫 음이
오늘은 심장을 툭 치고 들어왔다.
한순간 숨이 멎은 것처럼 조용한 정적이 지나고,
현악기의 무게가 천천히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게 조금 버거웠고,
무슨 말을 꺼내도 다 울컥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땐 이상하게 클래식을 틀게 된다.
말 대신 음표가 감정을 정리해 주는 느낌.
지금 내가 느끼는 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그냥 피곤함인지조차 모를 때
라흐마니노프는 단호하게, 그러나 다정하게 정리해 준다.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정말 우연한 순간이었다.
어떤 영화를 보다 지루해서 졸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웅장하고도 서늘한 피아노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이별하던 장면이었던 것 같긴 한데
정작 내 귀에 남은 건 그 장면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그날 이후, 이 곡은 나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았다.
무언가 말하지 못한 감정을
이 음악이 먼저 알아봐 주는 기분.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2악장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피아노와 현악기의 대화는
마치 오래전에 흘린 눈물이
다시 마음을 적시는 것만 같다.
언젠가 꺼내지 못한 말들,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이
음악의 틈 사이로 피어오른다.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감정이 다 말이 되기 전에
음악은 먼저 알아챈다.

요즘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해석하는 데 자꾸 실패한다.
왜 서운한지, 왜 울컥하는지,
왜 혼자인 게 좋았다가도 한순간 외로운지.
그럴 때 이 곡은 내 안의 감정을 정확히 집어 말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충분히 ‘이해받은 기분’을 준다.

그렇게 몇 번이고 이 곡을 되감는다.
두 번째 들을 때는 울컥했고,
세 번째엔 그저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무거운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누군가가 “괜찮아”라고 말해준 것 같은 기분.
그 말조차 들리지 않는 날엔,
음악이 대신 말해주는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커피잔을 들고,
오늘을 다시 살아보기로 한다.

이 곡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의 하루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