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되지 않아도 괜찮은 감정들
추천곡: Sergei Rachmaninoff – Piano Concerto No.4 in G Minor, Op.40
다음 주가 시험이다.
외워야 할 문장들과 풀어야 할 개념들이 머릿속에서 흘러내린다.
노트북 화면은 열려 있고, 펜도 손에 쥐고 있는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뭔가를 시작하려는 마음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몸 사이에서
나는 하루 종일 그저 앉아 있었다.
나른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고, 어깨는 무겁고,
머리 한가운데가 묘하게 지끈거린다.
졸린 것도 아니고, 완전히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몽롱함 속에서
나는 어설프게 앉아 있었다.
그럴 땐 책상에 더 오래 앉아 있으려 애쓰기보다
그냥 음악을 트는 쪽이 낫다.
집중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를 죄는 족쇄처럼 느껴질 때,
음악은 오히려 나를 풀어준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4번.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는 이 곡의 복잡함이 좋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음들이,
내 마음의 흐트러짐과 묘하게 닮아 있어서.
1악장은 초반부터 방향을 알 수 없다.
일정한 흐름 없이 이리저리 감정을 휘젓는다.
내가 느끼는 피로와 혼란, 그리고 이유 없는 불안이
이 음악 안에 다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고,
그 소리에 몸을 맡겼다.
피아노는 분명 격정적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침묵이 있었다.
마치 지금 내 머릿속처럼.
소리로 가득한데도
그 소리가 다 내 것이 아닌 느낌.
나는 그 피아노 속에 숨어 있는 ‘멈춤’을 들었다.
3악장에 이르면
불협화음 속에서 작은 선율이 피어난다.
혼란이 정리되진 않지만
어느새 리듬이 생기고, 중심이 잡힌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집중은 여전히 안 되고,
시험 준비도 진전은 없지만,
그래도 이 음악을 들은 후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잘 해내야 한다는 조급함보다는
지금의 나를 그냥 받아들이는 마음.
나는 라흐마니노프가
그걸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혼란을 통과하는 법,
집중하지 못하는 날을 견디는 법,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건네는 음악의 방식.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
딱 이 한 곡, 딱 이 순간까지.
음악이 끝난 뒤,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마신 지도 잊고 있던 커피는 다 식어 있었고,
창밖엔 늦은 오후 햇살이 기울어져 있었다.
하루가 흘렀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천천히 다시 밀려오려는 찰나,
이상하게 그 감정도 조금은 덜 날카롭게 다가왔다.
공부는 여전히 미뤄져 있고, 머리는 여전히 무겁지만
방금 전 그 음악처럼, 나도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한 곡도, 끝에는 길을 찾듯
이 어지러운 하루도 언젠간 정리되겠지.
지금은 그저 그렇게 믿어보는 수밖에.
그리고 그 믿음의 시작이
어쩌면, 이 한 곡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