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기만 해도 괜찮은 날..
추천곡: Claude Debussy – Clair de Lune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
그럴 땐 억지로 손을 움직이기보다
감정을 눌러 쓰기보다
그냥 멍하니 흘러가게 내버려두기로 한다.
Clair de Lune.
달빛이라는 이름을 가진 곡.
피아노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물 위에 떨어진다.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한 공간 안에
음표가 하나씩 스며들고,
나는 그 물결 위에 작은 조각배처럼 떠 있다.
머리는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다.
기분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모든 것이 조금 덜 선명하고,
모든 감각이 반쯤 잠든 것 같은 상태.
나는 그 상태를 억지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나를 그대로 안아주는 이 음악이 고마울 뿐이다.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어디론가 이어진 호숫가.
그 위에 띄운 조각배 하나.
배 안에 나는 일자로 누워 있고,
피아노 소리는 마치 물결처럼 배 주위를 감싼다.
누가 밀어주지 않아도,
누가 방향을 정해주지 않아도
배는 천천히 나아간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고,
그저 드뷔시의 음만이 나와 함께 흐른다.
Clair de Lune은 그 자체로 완벽한 밤을 만든다.
어떤 빛도 필요 없고,
어떤 말도 더해지지 않아도
이 음악은 나를 조용히 중심으로 되돌려준다.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몰라도 괜찮고,
오늘 하루 뭘 했는지 모르겠어도 괜찮다.
음악은 묻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옆에 있어준다.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는 건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다.
내가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어디에 도착하지 않아도,
음악은 나를 그냥 그대로 두는 법을 알고 있다.
흘러가는 게 아니라
흐르고 있는 나를 허락하는 일.
그것이 오늘 드뷔시가 나에게 건네준 말이었다.
조각배는 물살을 따라 천천히 떠내려가고,
나는 그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본다.
밤이 깊어도, 마음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음악이 달빛처럼 마음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