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는 음악
레오 얀나첵 – In the Mists 1악장
오늘은 창문을 열지 않았다.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깥은 흐리고, 공기는 습하고, 마음은 조용히 밑으로 가라앉는 날이었다. 그렇게 애써 다잡아놓은 감정들이 무너지는 날은 늘 별 이유 없이 온다. 딱히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마음이 어딘가 약해져 있는 느낌. 그럴 때면 브람스처럼, 쇼팽처럼 친근한 위로가 아니라, 나조차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틈을 알아주는 곡이 필요하다.
얀나첵의 ‘In the Mists’는 그런 날에 흘러야 할 곡이다.
1악장은 마치 안개처럼 시작된다. 분명 피아노 선율인데도, 들리는 듯 말리는 듯, 손끝에서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구조적으로도 비정형적이라 멜로디를 따라잡기 어렵지만, 묘하게 내 기분과 맞물린다. 자꾸만 흐트러지고, 중심을 잃고, 부유하는 그 느낌이, 지금의 나와 닮아 있다.
나는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피아노가 아니라 사람의 ‘숨’처럼 느껴졌다. 강하게 내뱉지도, 완전히 삼키지도 않은, 머뭇거리는 호흡 같은. 그래서인지 얀나첵의 음악은 나를 어루만지는 대신, 나의 안쪽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가볍게 터치하지 않아도, 그냥 같은 자리에 머물며 이 감정의 흐림을 같이 견디는 느낌.
안갯속에서는 가까운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내 앞의 사물도, 내 마음의 결도, 모두 뿌옇게 흐려진다. 그럴 때는 어설프게 뭔가를 분명히 하려 하지 않는다. 애써 정리하려 하면 더 어지럽다. 그냥 그 흐림을 인정하고, 조금 더 안으로 파고드는 수밖에.
얀나첵은 말하듯이 연주한다. 아니, 말하지 않는 법을 안다. 이 곡은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끝까지 같이 있어준다. 언뜻 차갑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은 그저 솔직함 때문이다. 친절한 척하지 않고, 위로하는 척하지 않고, 그저 안갯속에 서 있는 느낌. 어쩌면 그래서 더 위로가 된다.
나는 오늘 이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다. 똑같은 음이 아닌데도, 똑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바람도 없었지만, 내 안에서만 조용한 회오리가 일었다. 그런 날엔 굳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음악 한 곡 틀어두고, 감정의 깊이를 조용히 따라간다.
세상이 흐려질수록, 음악이 선명해지는 날이 있다. 얀나첵의 ‘In the Mists’는 그런 날에 나를 놓아준다. 나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 이 흐림을 지나도록.
그래서 나는, 오늘을 잘 견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