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하루 끝, 가만히 흐르는 위로
브람스 Intermezzo Op.118 No2.
휴일 오후의 끝자락. 저녁이 오기 전, 공기는 조용히 식어가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올 듯 말 듯, 하늘은 축축하고 무거웠다. 검푸른 구름이 천천히 낮게 깔리며 하늘과 건물 사이의 경계선을 지워갔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하고 맴도는 감정처럼, 비는 끝내 떨어지지 않은 채 공기 중을 떠다녔다.
그런 저녁이면 괜히 마음도 가라앉는다. 이렇다 할 일도 없고, 딱히 누가 그리운 것도 아닌데,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느낌. 속이 비었다는 건 꽤 묘한 감각이다. 채우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기엔 너무 허전한.
그럴 땐 브람스를 튼다. Intermezzo Op.118 No.2. 이 곡은 마치 그 허전함을 이해한다는 듯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첫 음이 손끝에서 흐르듯 부드럽게 시작되면, 내 마음도 조금씩 녹는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생각들이 서서히 풀리고, 감정의 결이 천천히 살아난다.
브람스의 이 곡은 위로하거나 끌어안기보다는,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다. 굳이 물어보지 않고,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게. 그저 같은 시간을 함께 흘려주는 존재. 빗방울 대신 흘러내리는 음표 하나하나가 잔잔히 가슴속에 스민다.
저녁이 깊어가고 방 안은 조금씩 어두워지는데, 불을 켤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이 어둠과 이 음악 속에 잠겨 있고 싶다. 커피는 이미 식었고, 창가에는 빛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음악은 아직 흐르고, 나는 그 안에서 고요해진다.
사실 그런 날이 있다. 특별히 슬픈 일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은, 감정이 어디쯤 걸려 있는 날. 그런 날의 기분을 브람스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연주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음악은 애절하지 않아도 가슴을 저민다.
나는 오늘, 그 음악 덕분에 무너지지 않았다. 오늘 같은 저녁이 또 올 테고, 또다시 이렇게 고요하게 지나갈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순간을 설명하게 될 날이 온다면, 난 이 곡을 들려주고 싶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이 곡을.
브람스는 말이 없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같다. 조금 느리더라도, 조심스럽더라도, 항상 마음을 품어주는 사람. 그러니 오늘 같은 날, 이 음악이 꼭 필요했다.
나는 다시 창밖을 본다. 여전히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엔 이미 한 줄기 빗소리가 잔잔히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