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정리되지 않는 감정,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흐트러짐조차 나다움이라는 위로

by Helia

Carl Philipp Emanuel Bach – Fantasia in F-sharp minor, H.300 (Wq.67)


가끔은, 내 마음 안에 흩어진 감정들을 하나하나 이름 붙여 정리하고 싶을 때가 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울컥 임이나, 사라지지 않는 서운함, 혹은 이유 모를 그리움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것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어지럽고, 어지럽다 보면 나 자신이 어지러워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모든 감정은 반드시 정리되어야만 할까?

나는 한동안 감정을 일기장처럼 구획 지으려 애썼다. 기쁨은 노란 페이지에, 슬픔은 회색 페이지에, 사랑은 분홍빛 페이지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조금 더 덜 복잡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건 종종 예상하지 못한 조합으로 찾아오곤 한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따뜻한 말에 울컥할 만큼 슬퍼지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가 이상하게 외로워지며, 이미 끝난 인연인데도 불쑥 설레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까 감정은 본디 정리를 거부하는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닐까.

정리되지 않는 감정 속에서 내가 마주한 건, 끝없는 ‘나’였다. 어쩌면 너무 솔직한, 그래서 버겁기까지 한 나. 남들은 깔끔하게 넘기고 가는 페이지를 나는 몇 번이고 되짚어 읽고, 문장 하나에도 마음을 묶어두었다. 그런 나를 누군가는 '지나치다'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예민하다'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도 그랬다. 지나쳤고 예민했다. 그러나 그건 내 감정이 진짜라는 증거였다. 쉽게 웃고, 쉽게 아파하고, 쉽게 흔들리는 나라는 사람의 진짜 얼굴이었다.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먹먹한 날이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도, 상처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심장이 조용히 멍든 날. 그런 날이면 괜히 ‘괜찮다’는 말이 억울해진다. 괜찮은 건데도 괜찮지 않은 것 같고, 괜찮지 않은 걸 알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스스로에게 마음이 불편해진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다가 결국, 아무도 없는 밤에 울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그런 감정은 어디에 정리해야 할까?

그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 위에 쌓아 올린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고통받지만, 그런 마음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때로는 불안정하고 어지러운 채로 나를 사랑해야 할 때도 있다.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다 표현할 수 없어도, 있는 그대로 두는 용기를 가지려 한다. 정리되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내가 내 마음을 조금 더 부드럽게 바라보게 된 방식이다.

살다 보면 ‘정리’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될 때가 있다. 관계도, 기억도, 마음도 깔끔히 접어두고 싶을 때. 하지만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이 말해주는 것이 있다. 그건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돈되지 않아도, 엉켜 있어도,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나다.

그러니 이제는 말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감정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눈물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굳이 답을 찾아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눈물이니까, 그래서 흘러야 했던 것이라고. 감정은 흘러야 사라진다. 아니, 흘러야 살아진다.

그 모든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 덕분에, 나는 조금씩 나를 이해하고, 나를 더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들이 뒤섞인 채로 나를 이루고 있었고, 그 복잡한 마음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살아 있게 했다. 그러니 나는 감히, 말해본다.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흐트러짐조차 나다움일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