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장.|우산을 씌워주던 그날, 여름이 말을 걸었다

낯선 이름의 소년, 나만 기억하는 다정한 사람

by Helia

Claude Debussy –〈Jardins sous la pluie (비 오는 정원)〉
(1903년 작곡, Estampes 중 제3곡)


열다섯 살의 여름은 유독 뜨겁고도 차가웠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한창 감정이 예민한 사춘기의 그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세상과 등을 지고 싶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 소리치듯 혼나고,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생각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무더위에 눅눅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냉각되고, 커다란 구름들이 마을 전체를 덮었다. 하늘이 우는 것처럼, 나도 울고 있었다. 이유는 잊었다. 아마도 말대답을 했던가, 방을 치우지 않았던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땐 모든 게 세상 끝처럼 느껴졌다.

나는 동네 골목 끝, 골목길과 도로가 만나는 모퉁이쯤에 주저앉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그냥 이대로 비에 젖어버리고 싶었다. 그게 나를 혼내던 엄마에게 복수라도 되는 양.

그때였다. 머리 위로, 파삭- 하는 우산 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앞에 내려앉은 건, 낯선 검정 우산 하나.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애를 처음으로 제대로 봤다.

우리 반도 아니고, 우리 학교도 아니었다. 그 애는 언덕 위, 남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말없이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선, 그대로 함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낯선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그렇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른다. 묘하게 익숙한 분위기, 말없이 건네던 그 우산 끝의 온기, 그리고 그의 젖은 어깨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까지.

나는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그 애는 내게 물었다.
“집에 안 가?”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그는 말없이 나란히 앉았다. 그러곤 우산을 살짝 기울여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어깨는 그대로 젖어갔다.

"괜찮아." 내가 입을 열었다. "비 맞는 거 좋아해."
그 애는 잠깐 웃었다.
"근데 울고 있잖아."
그 짧은 말에, 나는 울음이 다시 터져버렸다.

그 애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고, 판단하지 않았고, 그냥 그 자리에 함께 있어줬다.
어쩌면 그게 다였다. 내가 바란 위로라는 것이.

그날 이후, 나는 그 애를 다시 보지 못했다.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동네라는 건 참 묘해서 자주 마주치는 듯하면서도 전혀 마주치지 않는다.

그렇게, 여름의 한복판에서 만나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머물다 간 그 아이는, 내게 그 여름 전체를 설명해 주는 존재로 남았다. 열다섯의 나를, 다정함으로 감싸준 우산 하나.

어쩌면 나는 그 아이를 너무나 오래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그저 한 장면으로만 남아 있는 누군가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아직까지도 내 안의 따뜻한 어떤 구석을 건드린다.

지금도 여름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그날의 기억을 꺼내본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도시의 어딘가에도, 그때의 나처럼 쏟아지는 비에 우산 없이 서 있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또 누군가 그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줄지도.

누군가의 기억 속, 아주 조용히 우산 하나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깊은 다정함인가.

나는 그날의 그 아이에게, 다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말 한마디 없이도, 그 모든 것을 전해준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