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

슬픔이 고요를 만나 위로가 되던 순간

by Helia

슈베르트의 ‘Impromptu in G-flat major, Op.90 No.3’**


조리원에서 알게 된 언니들과 모처럼 시간을 보내던 날이었다. 육아라는 감옥에서 잠시 벗어난 우리는 웃고, 떠들고, 마셨다. 낯선 자유가 조금 어색했지만, 동시에 그리웠다. 아이 낳기 전의 나로 돌아간 듯한 기분. 정말이지, 몇 달 만에 숨통이 트이는 밤이었다.

“여보세요?”

그때 걸려온 전화는 엄마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고, 엄마의 목소리는 기어들 듯 낮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술기운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고, 손이 떨렸다. 장난이었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지금 농담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 리 없었다. 눈앞의 언니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나는 무작정 가방을 들고 택시를 잡아탔다. 서울 밤거리의 불빛은 언제나처럼 반짝였지만, 내 눈에는 모두 흐릿하게만 보였다.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기사님께 말했다.

“삼성 장례식장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입술을 깨물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를 힐끔 보던 기사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차량은 조용히 출발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지려 하고 있었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았던 감정이 서서히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결국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손등으로 닦으며 고개를 돌렸지만, 감춰지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기사님이 조용히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이셨다.

클래식 선율이 차 안에 스며들었다. 어떤 곡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피아노 소리였다.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을 것이다. 바흐였는지, 쇼팽이었는지, 나는 구분도 못했지만, 그날 그 곡은 내 마음의 균열을 천천히 감싸주는 듯했다.

그리고, 티슈 한 장이 조용히 운전석 너머로 내밀어졌다. 기사님의 손이었다.

“마음 많이 아프시죠. 다 표현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편하게 울어요.”

이 말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울음을 삼키지 않고, 그대로 쏟아냈다. 누군가의 따뜻한 배려가 이렇게 크게 와닿은 건 오랜만이었다. 말보다 더 깊은 위로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오는 법이니까.

그날의 기억은 내게 이상하리만치 또렷하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가족들과 마주하고, 차가워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보다 더 자상했던 그분을 마지막으로 마주한 순간까지.

하지만 그 슬픔의 도착지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택시 안의 그 클래식 선율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볼륨을 올려주시던, 그 낯선 사람의 손끝.

세월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그 곡이 무엇인지 모른다. 굳이 찾지 않았다. 그 곡은 어떤 유명한 작곡가의 작품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라디오 DJ의 선곡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내게 그 곡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함께한 음악’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 우리는 때로 너무 무방비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아무리 준비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슬픔은, 가장 일상적인 순간—웃고 떠들며 술 한잔 기울이는 그런 날—가장 예고 없이 찾아온다.

조리원 언니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작별을 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한가운데, 슬픔을 감싸주었던 한 남자의 작은 배려가 있었다.

지금도 클래식을 들을 때면, 문득 그날이 떠오른다. 잊고 있었던 감정이, 다시금 물결처럼 밀려든다. 피아노의 여린 음 하나에도, 눈물이 맺힐 것 같은 날이 있다.

이 글을 쓰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음악이란, 결국 기억의 그릇이 아닐까. 어떤 곡은 첫사랑의 향기를 담고 있고, 또 어떤 곡은 이별의 날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곡은, 택시 안 조용히 흐르던 클래식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길을 동행한다.

나는 그날 이후 클래식을 조금 다르게 듣게 되었다. 그전에는 그저 조용한 음악쯤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어떤 곡이든, 누군가의 기억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아 귀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가끔, 그 곡이 내 슬픔에 닿아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품는다.

살다 보면, 그렇게 어떤 순간은 음악과 함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