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멈춤이라는 이름의 회복

by Helia

어제, 내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망쳤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한 순간엔 아무 의도도 없었다. 웃기려던 것도, 아프게 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튀어나왔고,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상대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내가 말문을 열자마자 닫히는 눈빛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무슨 상태였을까?” 아무런 감정도 없이 내뱉은 말이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베일 수 있었을까. 혹시 정말,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걸까.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그런 순간을 마주한다. 대답은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하루를 보냈지만 무엇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으며, 사람들과 시간을 나눴지만 어떤 감정이었는지조차 흐릿해지는 날들. 반복되는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감정은 점점 무뎌지고 표정은 굳어간다. 어떤 날은,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한다. “아무 생각 없이 지냈어.”

침대에 누워서도, 텔레비전 소리는 흘러가고 눈은 화면을 향하지만 머릿속은 멈춰 있다. 메시지를 읽고도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귀는 열려 있지만 마음은 닫힌 상태. 살아는 있지만 살아내지 못하는 느낌. 숨은 쉬고 있지만 내 존재가 나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저녁. 그런 시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은 점점 흐려진다.

하지만 그런 흐릿함 속에서도 어떤 순간은 특별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밤, 오래된 노래 한 곡이 우연히 재생될 때. 혹은 버스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에 마음이 머무를 때. 아무 목적도, 의도도 없던 그때, 나는 문득 진짜 내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있던 그 상태가 사실은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따금, 사람들은 말한다. “그냥 그랬어.” “별일 없었어.” “그냥 멍했어.” 그런 말들 속엔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이 숨어 있다. 그날 누가 어떤 표정을 지었고, 내 앞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모두 기억나지만, 굳이 풀어낼 이유를 찾지 못해 생략하는 것이다. 감정을 말로 옮기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 아니면 꺼내는 순간 더욱 지치게 될까 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쪽에선 때때로 오해가 생긴다. 무관심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냉소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의 감정은 어긋난다.

사랑하는 이와 마주 앉은 식탁 위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같은 음식을 나누며도 마음은 딴 데 가 있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길은 스쳐 지나간다. 익숙함 속에서 애정은 점점 배경이 되고, 말보다 침묵이 많아진다. 그럴 때 한쪽이 묻는다. “왜 요즘 말이 없어?” 그러면 다른 쪽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그 속에는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쌓여 있다. 외면, 회피, 혹은 잊고 싶음. 너무 많이 느껴버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는 몸의 신호.

무심함은 때로 방어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생각을 멈추고 싶다는 마음의 외침이다.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언제나 반응을 요구받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간, 사람은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휴식을 시도한다. 아무 말도, 아무 계획도, 아무 판단도 하지 않고 잠시 정지한다. 그 상태를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있었다"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무념무상의 상태를 ‘참된 고요’라 일컫는다. 모든 것을 품되 집착하지 않고, 감정을 느끼되 휘둘리지 않는 상태. 그것은 단순한 무기력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자각이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욕망을 잠시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무 생각 없음’ 속에 때때로 그런 정적이 깃들어 있다. 말하자면, 그건 회피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잠시의 유예일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순간이 필요했다. 타인의 기대에 맞추느라 지친 날들, 내 감정을 해석해 줄 누군가가 없던 시기,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를 꺼두고, 불도 끄고, 방 한구석에 누워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무의미한 텅 빈 시간들이 내 안을 정리해 줬고, 그 틈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무심하게 보내는 하루가 반복되면, 언젠가 내 안의 감정도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저 표현하지 않았을 뿐, 지우려 한 게 아니라 숨겨둔 것이었다. 고요한 밤, 누군가의 문자를 읽고 울컥했던 적이 있다. 바람에 날리는 종이 한 장을 바라보다 오래전 상처가 떠오른 적도 있다. 그런 순간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오히려 너무 많이 느끼고 있었기에, 표현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자신을 숨긴다. 감정을 가리고, 마음을 접는다. 그건 약해서가 아니라,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오늘은 그냥 멍했어”라고 말한다면, 나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은 지금 말 대신 침묵을 선택했을 뿐이고, 그 침묵 속에는 아마도 말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 테니까.

나는 바란다. 누군가에게 그런 공간이 되어주기를. 아무 말 없이도 함께 있어주는 존재.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느껴주는 사람. 그저 곁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는 관계. 그리하여 그 사람의 하루 끝에, “오늘은 그냥 생각 없이 지냈지만 네가 있어서 괜찮았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말은 때때로 진심을 담기엔 부족하고, 설명은 감정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마음을 닫고,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둔다. 그런 상태를 누군가는 무관심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그러니 누군가가 “생각 없이 있었다”라고 말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함의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표정 속에 감정이 숨겨져 있음을, 침묵 뒤에 고백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이들의 곁에서 나는 오래도록 조용히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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