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말없이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by Helia

늘 그랬다. 조금 뒤처졌고, 조용했으며, 앞서 나서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순간은 어색했고, 목소리를 내기보단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성향은 성장기 내내 이어졌고, 그 결과 나 자신은 점점 흐릿한 존재가 되었다. 드러나지 않았고, 기억 속에서도 쉽게 잊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단 하나, 언제나 함께했던 동행이 있었다. 그건 이름이 없는 형체였고, 늘 나와 발을 맞췄으며, 사라진 듯 보이지만 결코 떠난 적 없는 존재였다. 빛이 있을 때에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해가 기울던 무렵, 땅바닥에 드리워진 자신의 실루엣을 밟으며 놀던 기억이 있다. 친구와의 놀이였고, 가볍게 웃어넘기던 장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상이 단순한 유희의 대상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또 하나의 증표였고, 말하지 못한 진심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어느 날 창문 앞에 앉아 흐릿한 빛 사이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윤곽이 내 옆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 실루엣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감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했던 복잡한 마음, 삼켰던 울음, 참았던 분노, 흘려보낸 후회까지—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는 듯했다. 감정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것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늘 같은 간격으로 발 밑을 따라왔고, 머뭇거릴 때조차 묵묵히 함께 걸었다.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밝게 웃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항상 조용한 이였다. 불쑥 내뱉은 한 마디가 어색할까 봐 입을 다물었고, 눈을 맞추기보단 고개를 숙였다. 어울리지 못한다는 생각은 점차 자리를 넓혔고, 마침내 나는 스스로를 지우는 데 익숙해졌다. 다만 그런 날들에도 곁에는 변함없이 따라오는 무엇이 있었다. 외롭다고 느낀 순간조차 그 실루엣은 말없이 내 곁에 서 있었다.

그 형상은 거울 같았다. 내가 외면한 감정을 고스란히 반사했고, 잊고 지냈던 진심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다. 슬펐던 날, 기댈 어깨 하나 없었던 저녁,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존재 하나만 간절했던 새벽, 그 모든 시간에 함께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것이었다. 스스로를 잃어가는 와중에도, 그것은 나를 나로 기억하게 해 주었다.

누군가의 곁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그 사람의 빛만 보게 된다. 성공, 환한 웃음, 멋진 말들. 그러나 진짜 마음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 눈물이 마른자리에 남은 고요함,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의 끝자락, 아무 말 없이 전해진 손끝의 따뜻함. 나는 그런 것들을 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의 공기 속에는 늘 같은 형상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 존재.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계절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하루의 끝자락, 노을이 번지는 길가에 서서 조용히 발밑을 내려다보면,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그늘 아래 길게 드리워진 윤곽을 따라 어릴 적 나, 사춘기 시절의 나, 지금의 내가 겹쳐진다.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 형상은 알고 있었다. 혼자였던 시간에도 누군가 내 곁에 있었다는 걸, 그 형상이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은 흔들릴 때 비로소 진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고요한 날보다 혼란스러운 시기가 오히려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발밑을 본다. 그것은 늘 거기 있었다. 숨기려 했던 감정, 들키고 싶지 않았던 상처,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런 형체를 보며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 괜찮다고. 여전히 너는 여기 있다고.

세상은 앞만 보라고 말한다.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과거 속에 있는 감정들이야말로 지금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걸. 그 안에 있는 다정함, 눈물, 떨림, 기쁨, 모든 것이 삶을 구성하는 조각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장 정직하게 간직한 존재가 있다면, 바로 내가 남긴 형상일 것이다.

나는 바란다. 누군가의 삶 속에서 그런 형상이 되기를. 요란하지 않지만 조용히 곁에 머물며, 무너지지 않도록 다정히 지켜주는 존재. 이름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득하게 떠오르는 실루엣. 불쑥 고개를 돌렸을 때, 기억 속 풍경 어디쯤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 무언가로 남기를.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지만, 결코 부담되지 않았던 존재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있는 곳에도 조용한 윤곽 하나가 길게 늘어져 있다. 말은 없지만 마음은 닿아 있다. 나보다 더 나를 오래 지켜봐 주었고,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존재. 나는 오늘도 그것과 함께 걷는다. 그 실루엣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그런 존재를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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