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안아주는 연습
클래식 추천곡
Max Richter - “On The Nature of Daylight”
“왜 그렇게 별일도 아닌데 서운해해?”
“그거, 애정결핍이야.”
그 말을 들은 건 카페 구석 테이블에서였다.
스무 살 후반, 나는 친구가 늘어놓던 고민의 배경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을 던졌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진심일까.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일까.
그 말에 담긴 온도가 무엇이었든, 나는 그 순간 숨을 멈췄다.
누군가의 무관심에 상처받고,
눈빛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혼자서 수십 가지 해석을 곱씹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건 거창한 애정이 아니었다.
단지 따뜻한 한마디, 시선을 마주해 주는 용기,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태도였다.
그런데 왜, 그토록 간단한 것조차 매번 손에 닿지 않았을까.
나는 자주 혼자였다.
어릴 적부터 방 한쪽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울고 싶을 땐 숨죽였고, 억울할 땐 침묵했다.
감정을 꺼내는 순간, 더 큰 소리로 덮여버릴까 봐,
늘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른들이 말하곤 했다.
"조용한 게 참 착하다."
그 말에 익숙해질수록,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
표정 변화를 살피고, 대화의 여백을 불안하게 받아들인다.
침묵이 불편하다.
대답 없는 문자 하나에 가슴이 조여 온다.
가끔은 연락이 없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머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괜찮음’을 몸이 믿지 않는다.
그래서 확인하려 들고, 애써 무심한 척하다가,
결국 혼자 속을 끓인다.
그게 내가 오래도록 해왔던 방식이다.
애정결핍은 굶주림과 닮았다.
따뜻한 온기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닿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그러다 반복되는 거절과 무시 속에서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다.
그 구멍은 처음엔 작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진다.
그리고 결국, 아무리 많은 관심이 쏟아져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나는 그 빈틈을 사랑이라 믿었다.
그러다 만난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너는 왜 이렇게 쉽게 다가가?”
“그렇게 살면 다친다.”
“조금은 무심해도 돼.”
그들은 걱정했지만, 나는 그 말들이 서운했다.
무심하다는 말이, 외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흔들리지 않기를,
혼자서도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허전함을 남에게서 채우려 할 때,
문제가 시작된다.
나는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늘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있었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고,
‘넌 충분하다’는 위로가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 자신을 마주한 어느 저녁,
이 질문을 던졌다.
“너는 스스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니?”
그날 이후 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하루 끝에 내게 말을 걸었다.
“힘들었지?”
“수고했어.”
“괜찮아. 오늘도 잘했어.”
처음엔 어색했지만, 그 문장들이
조금씩 안쪽에서 무언가를 어루만졌다.
누군가의 인정 없이도
스스로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체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보인다.
상대의 반응에 과하게 예민한 사람,
가벼운 말에도 깊이 상처받는 사람.
그들은 약한 게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애를 써온 이들이다.
자기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온 흔적이며,
끝까지 버티려 애쓴 기록이다.
그 마음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지친다.
이제는 내가 먼저 내 손을 잡아주기로 했다.
그 어떤 애정보다 먼저,
나를 향한 온기가 우선이라는 것을 이제야 안다.
그래서 다시 누군가가 말해도 괜찮다.
“그거, 애정결핍 아니야?”
이젠 웃으며 대답할 수 있다.
“그래. 예전엔 그랬지.
지금은 내가 나를 가장 따뜻하게 안아주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