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장| 조용한 말일수록 더 멀리 가요

마음은 늘 먼저 가 있었어요

by Helia

추천 클래식
Gabriel Fauré – Pavane, Op. 50


나는 늘 말이 늦었다. 상대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하고 싶은 말은 속으로만 수백 번 되뇌다가 결국 삼켜버리기 일쑤였다. 돌이켜 보면 감정보다 말이 느려서 자주 마음이 먼저 다쳤다. 생각은 많은데 표현은 서툴렀고, 대화는 시작도 전에 엉켜버리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조용한 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 조용함 속에서 매일 수십 편의 이야기를 썼다. 말 대신 쓴 글이었고, 눈 대신 적은 감정들이었다.

말하지 않아야 덜 아픈 줄 알았다.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운 탓이었다. 그리고 내 말이 누군가에게 미움을 살까 두려웠다. 설명을 덧붙이기도 전에 끊기는 대화 속에서, 나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침묵은 나를 보호했고, 동시에 나를 고립시켰다. 그렇게 쌓인 말들은 입이 아니라 종이 위에서 터졌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절한 감정들이 문장이 되어 나왔다. 어린 시절 일기장에 흐릿하게 번진 잉크 자국은 내가 세상에 겨우 내던졌던 언어의 흔적이었다.

나는 말보다 글을 믿었다. 글은 서두르지 않았고, 내 마음을 기다려주었다. 내가 준비될 때까지, 그리고 누군가가 읽을 준비가 될 때까지 천천히 말해주는 방식이 좋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나는 비로소 나다워졌다. 말로는 다 하지 못했던 고백들, 못다 한 미안함과 못 이룬 꿈들, 그리고 내 안의 오랜 침묵까지 글은 다 품어주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외롭지 않았다. 내 속에 잠들어 있던 언어들이 비로소 깨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더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봐, 혹은 잘못 해석되어 나를 오해할까 봐, 나는 늘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에서 진심은 빠져나가고, 겉도는 말만 남았다. 말은 많이 했는데,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쌓였다. 말은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고, 조심스러운 말은 결국 침묵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조용해졌다.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진실을 깨달았다. 크게 외치는 말보다 조용히 건넨 말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그런 말들은 짧지만 깊다. 소리 내지 않아도 마음에 닿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머물러 주는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그래서 나는 내 언어를 바꾸지 않기로 했다. 세련되지 않아도, 빠르지 않아도, 어쩌면 더듬거리더라도 괜찮다. 다만 그것이 진심이길 바랐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지금의 나는 매일 한 문장씩 나에게 말을 건다. “오늘도 잘 버텼어.” “울어도 괜찮아.” “그 마음, 나도 알아.” 이런 말들은 거창하지 않지만 나를 살아 있게 한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았던 그날처럼, 누군가의 다정한 말에 살아났던 그날도 있었다. 말은 무기이기도 하지만, 다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언어는 다리 쪽에 가까웠다. 누군가를 향해 다가가는 방식, 그 조용하고 서툰 발걸음. 나는 그걸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쓰는 언어는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투박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의 삶과 선택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상처를 조심스레 감싸는 붕대처럼, 소란한 마음을 조용히 다독이는 손길처럼. 그래서 나는 이 언어로 사랑하고, 이 언어로 위로한다. 내 언어는 누군가를 안아주는 방식이다. 아무도 없는 방 안, 고요한 새벽에 나를 일으키는 말. “너는 잘하고 있어.” 그 한마디로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나날.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말이 서툰 사람이라면, 그래서 늘 오해받고 상처받은 경험이 있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조용한 말일수록 더 멀리 가요. 크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정함은 소리보다 마음으로 전해지고, 침묵 속에도 사랑은 머무를 수 있어요. 당신의 언어가 당신을 지켜주기를. 그리고 그 언어로 누군가를 안아줄 수 있기를. 내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