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장 | 첫, 사랑

말하지 못한 마음이 오래 남았다

by Helia

클래식 추천곡
Frédéric Chopin – Nocturne in E-flat major, Op. 9, No. 2


첫사랑은, 말하지 못한 게 너무 많아서 오래 남는다.
그래서 기억은 흐려져도 마음은 또렷하다.
잘 지냈는지도 모른다. 이름 석 자도 멀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그때의 공기와 그 사람의 눈빛이 떠오른다.
첫사랑은 그렇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그 사람과 걷던 길도, 함께 웃었던 교실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내 마음도.
세월은 그것들을 조용히 뒤로 밀었지만, 사라지게 하진 못했다.
나는 가끔 그 시절의 나를 꺼내어 본다.
책상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둔 오래된 사진처럼, 조심스럽게 펼쳐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때의 햇살과 설렘과 떨림을 느낀다.

처음 좋아하게 된 사람.
그 감정은 어찌나 낯설고 어지럽던지, 내가 왜 이렇게 숨이 가쁜지조차 몰랐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날이면 하루가 길게 이어졌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짧은 순간에도 심장이 다 무너질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세상에 처음 생겨난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나는 그 사람을 오래 바라만 봤다.
말을 걸 수도 없었고, 고백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걷는 걸음에 속도를 맞추고, 교과서에 적힌 이름 옆에 작은 낙서를 남기고,
복도 끝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혼자 웃곤 했다.
누구보다 사랑했고, 누구보다 멀리서 바라봤다.
어쩌면 첫사랑은 그랬다. 손에 쥐지 못했기에 더 깊이 품은 감정.

그날도 평소처럼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책을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고,
그 사람은 맞은편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오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오늘은 네가 먼저 갔네?”
툭 던지듯 건넨 그 말이 나에겐 고백처럼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날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말을 되뇌었다.

어쩌면 그 말은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첫사랑이란 건, 사소한 말에도 마음이 전부 흔들리는 일이다.
눈빛 하나, 인사 한 마디,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 세상이 뒤집힌다.
첫사랑은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사랑보다 사랑 아닌 시간들이 더 많았기에.
이루지 못했기에 더 깊은 감정으로 스며들었기에.

첫사랑을 이룬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첫사랑은 끝내지 못한 이야기로 남는다.
말하지 못해서, 알리지 못해서, 혹은 너무 어려서.
그리고 그 ‘못한’ 감정들이 마음에 켜켜이 쌓인다.
그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시절의 나와 함께, 조용히 안쪽에 앉아 있다.

지금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안다.
사랑을 말하는 법도 알고, 떠나보내는 법도 배웠다.
그러나 첫사랑은 달랐다.
그 감정은 사랑을 몰랐기에 더 깊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참 정직했다.
잘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계산하지도 않았다.
좋으면 좋은 거고, 보고 싶으면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했다.
무모하고 순진했지만, 그만큼 진심이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첫사랑을 잊었느냐고.
나는 대답한다. “아니, 그 감정은 아직도 살아 있어.”
그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나와 그때의 마음이.
나는 그 기억을 잊지 않기로 했다.
잊는다는 건 지우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 일이니까.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고마워. 너 덕분에 내가 내 마음을 알게 됐어.”

첫사랑은, 사랑의 시작이자 나의 시작이었다.
그 사람을 좋아했던 내가 있었기에,
지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나도 있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서툴렀고, 느렸고, 조용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간절했고, 누구보다 정직했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설렌다.
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같은 계절을 마주했을 때, 나를 떠올려줄까.
첫사랑은 그런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같지 않은 이야기.
그 이야기 하나로 우리는 마음속 풍경 하나쯤 간직하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첫사랑은 아픔보다 고마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너의 첫사랑은 누구였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지 못했지만, 아주 깊이 사랑했었어.”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의 나를 더 다정하게 만들어줬다고.

혹시, 당신의 첫사랑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눈빛 하나는 또렷하지 않나요?
첫사랑이 떠오르는 그 순간, 마음 어딘가가 따뜻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랑은 여전히 당신 안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