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장|H

이름 속 가운데 자리한 H, 나의 중심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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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es Brahms –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4th movement (Allegro energico e passionato)

알파벳을 처음 배울 때는 그저 소리와 모양이 있을 뿐이었다. 교과서 맨 앞장에 줄지어 선 글자들을 소리 내 따라 읽으며, 나는 그것들이 단지 약속된 부호일 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삶이 내게 이름을 주고, 이름 속 글자가 나의 무게를 떠안기 시작했을 때, 알파벳은 더 이상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어떤 것은 문장이 되고, 어떤 것은 추억이 되었으며, 어떤 것은 사랑과 상실의 흔적이 되었다. 그 가운데 늘 나를 붙잡아둔 글자 하나가 있었다. H.

H는 내 이름의 한가운데 있다. 처음도 끝도 아닌 중심부. 조용히 자리하면서도 내 이름 전체의 균형을 지탱하는 버팀목 같다. 나는 종종 그 글자를 인생의 심장부처럼 느낀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울려 나오는 고유의 울림, 그 사이에서 흔들리더라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하나의 기둥.


이상하게도, 나와 오래도록 함께했던 이들 가운데서도 H는 반복되었다. 세 해를 나란히 걸어간 그의 이름에도 한가운데 H가 있었다.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을 나란히 적으면,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음에도 같은 중심을 품은 듯 보였다. 우리는 어쩌면 그 한 글자 덕분에 오래도록 서로를 붙잡아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이 남긴 장난 같기도, 필연적인 암호 같기도 했다.


사랑이 끝났을 때, 나는 그 글자를 곧장 지워버리고 싶었다. 책 속에서, 간판 위에서, 심지어 내 이름 속에서조차 H를 읽어낼 수 없었다. H는 알파벳이 아니라 상실의 기호였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놀랍게도 스스로 H를 불러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작가명 속에. 의도였는지 무의식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내가 다시금 H를 삶의 중심에 앉혔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가끔 H의 모양을 들여다본다. 두 개의 기둥 사이를 잇는 가로획. 서로 닿지 못한 채 서 있는 두 끝을 단 하나의 다리가 연결한다. 그것은 나와 그를 이어주던 다리 같았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통로 같았다. 사랑이 끝나도 기억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다. 단단히 걸쳐진 그 하나의 획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청춘 시절, 내가 열렬히 좋아하던 핑클의 이효리. 그녀의 이름 속에도 어김없이 H가 들어 있었다. 무대 위에서 반짝이던 눈빛, 청춘을 흔들던 노래, 그 모든 순간마다 내 마음속에서도 같은 글자가 빛났다. 어린 시절의 우상조차 H와 함께였다.


되돌아보니, 내가 숱하게 스쳐 보낸 인연들 속에도 묘하게 가운데 이니셜이 H였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반복적인 기호였다. 마치 내 삶은 늘 H라는 축을 따라 흘러왔던 것처럼. 어떤 사람은 스쳐 지나갔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남겼으며, 또 어떤 사람은 기억 속에 부드럽게 잔상만 남겼다. 그러나 그 모두의 중심에는 똑같이 H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깨닫는다. H는 단순한 약자가 아니다. 내 이름을 지탱하는 중심이며, 사랑의 흔적이고, 추억의 표식이며, 지금도 내 글을 이어주는 기호다. 그것은 나의 역사이자 정체성, 곧 내 삶을 이끄는 암호다.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별빛 속에서 H를 그려보곤 한다. 두 개의 별이 기둥처럼 서 있고, 그 사이를 은하수의 빛줄기가 가로지른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결국은 빛으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나는 떠나간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이미 지나간 사랑, 잊힌 인연,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 그 모든 이들이 H라는 다리 위에 서 있다.


나는 이제 H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때는 상실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삶의 무늬다. 내 이름 속 H, 그의 이름 속 H, 작가명의 H, 내가 사랑했던 우상의 H, 그리고 스쳐간 인연들의 H. 그 모든 것이 모여 하나의 문장을 완성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 글을 읽으며 이니셜 하나를 발견한다면, 그 또한 자기 삶의 중심을 문득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 순간, 우리는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H는 오늘도 내 이름 속에서, 내 기억 속에서, 그리고 내 글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