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장|별 이유 없이, 마음이 멈추는 순간

이유 없는 감정이 삶을 채운다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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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Ravel – Piano Concerto in G major, M.83: II. Adagio assai


왜 그런 날 있잖아요.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벅차거나,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날. 특별한 사건도, 누군가의 말도 아닌데, 이유 모를 파동이 불쑥 밀려와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그때의 마음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남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감정에 이름을 붙이려 했습니다. 웃음은 왜 터졌는지, 눈물은 무슨 사연 때문인지, 분노는 어디서 비롯됐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서른을 넘어서면서 알게 됩니다. 모든 마음이 반드시 이유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이유 없는 감정 속에서야 비로소 가장 솔직한 내가 드러난다는 걸.

커피도 그랬습니다. 젊을 땐 하루에 몇 잔도 모자라던 걸, 이제는 1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합니다. 심장이 덜컥거려 밤잠을 잃는 게 싫어서죠. 예전 같으면 잠 못 드는 새벽조차 낭만으로 여기며 즐겼겠지만, 지금은 단순합니다. 불필요하게 나를 흔드는 건 멀리합니다. 그렇게 심플해진 선택 속에서 몸도 마음도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뎌진 건 아닙니다. 별일 아닌 일은 웃으며 넘길 수 있지만, 상처가 되는 말 앞에서는 여전히 흔들립니다. 달라진 건 방식이죠. 예전에는 화를 터뜨리고, 그 말에 매달려 밤을 지새웠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화낼 가치가 없는 이라면 그냥 내 삶 밖으로 내보냅니다. 여전히 아프지만, 그 사람을 더는 붙잡지 않습니다. 그게 나를 지키는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화는 여전히 남습니다. 다만 더 이상 폭발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속에 선을 긋습니다. 가까이 두지 않는 것, 다시 신뢰하지 않는 것. 그렇게 거리를 두는 순간, 나는 나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어른의 분노는 큰 소리보다 조용한 퇴장에 가깝다는 걸 이제야 압니다.

그러다 별 이유 없이 웃음이 터집니다. 따뜻한 잔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예뻐 보여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오래된 노래 한 소절에 마음이 흔들려서, 그냥 이유 없는 기분에 밀려서. 반대로 이유 없는 눈물이 차오를 때도 있습니다. 서러운 일도 없는데, 오래 묵은 울음이 불쑥 솟아올라 스스로도 놀랄 때. 이유 없는 웃음과 눈물, 그 무작위 한 진심 속에서 오히려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길 위에서 문득 멈추는 일도 그렇습니다. 매일 지나던 골목인데, 낡은 건물 외벽에 앉은 햇살이 낯설 만큼 아름답게 보일 때. 낮잠 자는 고양이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건드릴 때. 아무 의미 없는 풍경 속에서 오히려 세상은 가장 또렷해집니다. 이유 없는 순간은 잠시 틈을 열어, 그 사이로 빛을 흘려보냅니다.

글을 쓰는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꼭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도, 거창한 목적을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지금의 나를 남겨두고 싶어서,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씁니다. 계산하지 않은 문장은 때로 어설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진심을 드러냅니다.

돌이켜보면, 삶의 중요한 선택들은 대부분 이유 없이 시작됐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끌린 순간도, 낯선 도시를 떠나고 싶던 충동도. 계획이나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작은 파동 하나가 나를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 파동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습니다. 안전한 길은 늘 이유가 분명했지만,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든 건 대부분 이유 없는 충동이었습니다.

때로는 이유 없이 그리운 얼굴이 떠오릅니다. 오래전 멀어진 친구일 수도,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 수도, 아직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움은 설명할 수 없기에 더 진실합니다. 아마 우리의 삶은 그런 이유 없는 그리움들이 서로 이어 붙여진 지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별 이유 없이 찾아오는 순간들이야말로 내 삶을 이루는 조각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는 기억들. 이유를 묻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나를 살아 있게 합니다.

오늘도 나는 별 이유 없이 창밖을 봅니다.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햇살이 유리창에 부서집니다. 아무 의미를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 그게 내 삶의 이유입니다. 아니, 이유조차 필요 없는 삶의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