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장|어른이 된다는 건

미완성으로 살아가는 법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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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교향곡 3번 F장조, Op.90, 3악장 Poco Allegretto


어릴 적 나는 어른이 되면 세상이 분명해질 줄 알았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사고 싶은 걸 자유롭게 사고,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분명해진 건 하나도 없었다. 자유는 있었지만, 그 자유엔 책임이 달려 있었다. 그 무게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다는 걸, 나는 늦게야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보호막이 사라지는 일이다. 아플 때 달려와주던 사람이 없고, 잘못해도 대신 책임져줄 존재가 없다. 병원에서 보호자 서명란에 내 이름을 적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손이 떨렸다. 아, 이제 내가 누군가의 보호자구나. 더 이상 아이가 아니구나. 그날 이후 세상은 조금 달라 보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외로움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퇴근길, 불 꺼진 집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느껴지는 고요. 예전엔 그런 적막이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나는 전등 스위치를 켜며 스스로 말한다. “괜찮아, 오늘도 잘 버텼어.” 그 말 한마디가 작은 위로가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포기를 배우는 일이다. 모든 걸 가질 수 없다는 걸, 나는 서른 즈음에서야 인정했다. 좋아하는 일과 안정적인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사랑하지만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고, 꿈꾸던 길을 돌아서 가야만 했다. 포기는 패배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이었다. 버릴 줄 알아야, 내 손에 남은 것을 끝내 붙잡을 수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안의 아이와 화해하는 과정이다. 나는 여전히 별것 아닌 말에 상처받고,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서 울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투정을 부린다. 그럴 때면 예전 같으면 스스로를 책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말한다. “그래, 네가 힘들구나. 조금 울어도 괜찮아.” 내 안의 아이를 안아주는 순간, 나는 진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을 짊어지는 일이다. 가족을 돌보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 나 자신을 버티게 하는 일. 책임은 때로는 무거운 쇳덩이 같았지만, 동시에 나를 지탱하는 뿌리였다. 그 뿌리가 깊어질수록, 흔들려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정답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시험에는 늘 답이 있었지만, 인생에는 답안지가 없었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몰라 고민하다가도 결국엔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선택 뒤엔 언제나 후회가 따라왔다. 하지만 후회조차 나의 일부가 되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답 없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연습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랑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아이 때의 사랑이 불꽃같았다면, 어른의 사랑은 불씨에 가깝다. 한 번에 번쩍 타오르진 않지만, 오래가고 깊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꾸준함이고, 선택이고, 책임이라는 걸 이제야 안다. 함께 걷고 싶은 사람 앞에서 시간을 내어주고, 내 마음을 조용히 건네는 일. 그것이 어른의 사랑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상실을 껴안는 일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 사라져 버린 시간, 놓쳐버린 기회들. 예전엔 그 빈자리를 부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상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빈자리를 안고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상실이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눈물로 다져진 자리가, 어느새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흔들린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건, 흔들림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이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것, 그게 어른이 된다는 뜻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나이는 어른인데 마음은 여전히 아이 같을 때가 많다. 계획은 서툴고, 사랑은 미숙하고, 실패 앞에선 여전히 겁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모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미완성인 채로 살아가는 것, 그것도 어른의 모습이니까.

돌아보면, 어른이 된다는 건 완성에 다다르는 게 아니라 여전히 배우는 일의 연속이었다. 외로움 속에서 균형을 찾고, 포기 속에서 길을 찾고, 상실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조금씩 단단해진다.

나는 오늘도 어른으로 살아간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더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때로는 무너져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걸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이해한 어른의 삶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완성이 아니라, 여전히 배우는 과정이란다. 흔들려도 괜찮아. 그게 어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