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장|옛날, 눈 쌓인 장독대 위의 기억

옛날은 아직도 내 안에 산다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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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장독대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이던 그 겨울. 나는 외가에서 자랐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 집의 부엌과 마당, 그리고 그 안에서 숨 쉬던 공기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가도 금세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는 시간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풍경들. 그것이 내 옛날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일곱 살까지 내 세계는 온통 외가였다. 할머니의 부엌은 작은 우주였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집 안 가득 구수한 향기가 퍼졌고, 된장이 끓는 소리, 갓 지은 밥의 포슬포슬한 숨결, 장아찌의 매콤한 기운이 뒤섞여 어린 날의 공기를 만들었다. 나는 문턱에 앉아 작은 손으로 마늘을 까고 파를 다듬으며 스스로도 제 몫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에 취하곤 했다. 할머니는 “손 조심해라” 하고 다정한 눈길을 보내셨고, 국자로 떠서 건네주던 국물은 늘 뜨거워서 혀끝을 데곤 했지만, 그 뜨거움마저 지금은 정겨운 맛으로 남아 있다. 할아버지는 늘 마당에 계셨다. 삽을 들고 흙을 고르고, 나무를 다듬고, 여름이면 텃밭에 물을 주셨다. 나는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다녔는데, 말수는 적으셨지만 눈빛 하나로 모든 마음을 전해주셨다. 내가 흙장난을 하며 옷을 더럽혀도 나무라지 않고 허허 웃어주던 미소는 어린 내게 가장 큰 위로였다. 담배 연기 너머로 스치던 그 눈빛은 아직도 내 안에서 울린다. 침묵이 목소리보다 더 따뜻할 수 있다는 걸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배웠다. 그러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나는 엄마와 살게 되었다.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지붕 아래 잠을 잤지만, 이상하게도 엄마와의 기억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머리카락을 묶어주던 손길이나 길을 잡아주던 따스한 손 같은 장면들은 분명 있었을 텐데, 지금은 뿌옇게 흩어져 있다. 엄마는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별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눈앞에 있지만 손끝에 닿지 않는 존재, 그 아련한 거리는 어린 마음에 알 수 없는 그늘을 남겼다. 그렇다고 외가와의 인연이 끝난 건 아니었다. 방학이면 나는 언제나 다시 외가로 갔다. 여름방학엔 매미 소리 가득한 마당에서 뛰놀았고, 겨울방학엔 군불로 데운 방에서 이불을 덮고 뒹구는 게 세상 행복이었다. 엄마와 함께 살면서도 내 기억 속 진짜 고향은 여전히 외가였다. 비 오는 여름밤, 전기가 나가 촛불을 켜고 앉던 순간도 또렷하다. 작은 불빛에 의지해 앉으면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고, 벽에 드리운 그림자들은 춤을 추듯 움직였다. 할아버지는 느릿한 목소리로 한두 마디를 보태셨고, 그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무대였다. 옛날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은 애틋해진다. 이미 사라진 집, 낡아 무너진 담벼락,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사람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라짐은 영원함이 된다. 다시 닿을 수 없기에 기억 속에서는 더 반짝인다. 나는 종종 마음속에서 일곱 살의 나를 불러본다. “그때의 나야, 잘 있니?” 대답은 들리지 않지만, 분명 그 아이는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그 웃음은 지금도 내 안에서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이 된다. 이제는 알겠다. 옛날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일으켜 세우는 뿌리다. 내가 여전히 웃고 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건, 그 시절 내 곁을 지켜주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기억이 희미하다고 해서 내 유년이 공허했던 건 아니다. 외가에서 보낸 날들이 나를 더욱 단단히 감싸주었으니까. 할머니의 부엌, 할아버지의 마당, 촛불 아래서 흐르던 이야기들. 그 모든 게 내 안에서 지금도 숨 쉬고 있다. 옛날은 내게 여전히 반짝이는 현재다. 눈 덮인 장독대, 김 서린 창문, 햇살이 부서지던 마당. 그 장면들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언젠가 내 아이도 오늘을 떠올리며 “옛날에는…” 하고 말하겠지. 그때의 오늘이 또 다른 옛날이 되어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옛날은 어디에 있나요? 당신도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냄새가 있나요? 그 한 장면이 지금의 당신을 지탱하고 있지는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