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이 남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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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 겨울 나그네 (Winterreise, D.911)
당신은 오늘 몇 걸음을 걸었나요? 숫자로 찍히는 만보계의 기록이 아니라, 마음속에 새겨진 발자국 말입니다. 누군가와 나란히 걸으며 웃음을 나눈 순간, 홀로 길을 걸으며 고개를 숙였던 순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어서 울며 내디뎠던 그 발걸음. 삶은 결국 수많은 걸음의 이어 짐일 뿐이라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걸음은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언어와도 같습니다. 아기는 말보다 먼저 걷기를 시작합니다. 불안정한 두 다리로 세상에 균형을 맞추려 애쓰는 그 순간, 부모의 눈에는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비치겠지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걸음 속에는 실패보다 도전이 더 본능적이라는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누구나 첫걸음을 직접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흔적 없이는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의 기억 속에도 걸음은 늘 중요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운동장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피가 스며든 살갗 위로 흙먼지가 달라붙던 감각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울며 일어나 다시 집까지 걸어간 길, 그때 배운 것은 단순히 걷는 법이 아니라 ‘아픔을 안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청춘의 문턱에 들어서자 걸음은 점점 속도를 요구했습니다. 열여덟 무렵의 나는 앞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조급함 속에 살았습니다. 다른 이보다 빨라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차올랐습니다. 길 위에서 풍경을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고, 옆을 걷던 사람의 속도 따위는 무시한 채 앞만 보며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앞서간 끝에 남은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공허감이었습니다. 함께 걷던 사람을 잃었고, 마음은 늘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걸음이란 경쟁을 위한 속도가 아니라, 내 호흡에 맞춰 자신과 함께 가는 일이라는 것을.
걸음에는 계절이 스며듭니다. 봄날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합니다. 새싹이 터져 나오는 소리를 따라가듯 들뜬 마음이 발끝을 밀어 올려,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듯합니다. 여름의 걸음은 땀에 젖어 무겁지만 그 속에는 불타는 에너지가 숨어 있습니다. 가을의 걸음은 성찰에 가까워,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이 저릿합니다. 겨울의 걸음은 고요하고 단단합니다.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은 금세 사라지지만, 그 짧은 흔적마저 유일한 기록으로 남습니다.
내 삶 역시 계절 같은 걸음으로 이어져왔습니다. 스무 살, 혼자 기차에 올라 낯선 도시를 향해 가던 날을 기억합니다.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그 길 위에서 발걸음은 자꾸만 멈칫거렸습니다. 그러나 내딛고 나니 새로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이 나를 성장시켰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와 나란히 걷던 길이 어느 날 갑자기 혼자의 길로 바뀔 때도 있었습니다. 발자국이 두 개에서 하나로 줄어드는 순간, 세상은 텅 빈 듯 보였지만 그 길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겨진 발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걸음 속에서 나는 상실을 견디고, 비워진 마음을 조금씩 채워왔습니다.
신발을 보면 삶의 걸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낡고 해진 밑창, 긁힌 흔적들 속에는 그 신발이 밟아온 수많은 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신발이 닳아갈수록 그만큼 내가 살아왔음을 증명합니다. 걸음은 책장 넘기듯 하나의 장을 끝내고 또 다른 장을 열어갑니다. 닳아간다는 건 사라짐이 아니라 채워짐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된 신발에서 배웠습니다.
걸음은 사람을 닮습니다. 어떤 이는 늘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주변을 살피고, 어떤 이는 거침없이 내딛으며 앞을 열어갑니다. 아이의 걸음은 미래를 향해 있고, 노인의 걸음은 지난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이 다르고 속도가 달라도 결국 모든 발걸음은 한 가지 사실로 모입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걷는 존재라는 것. 그 걸음이 느려도 좋고, 때로는 뒤로 물러서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입니다.
나는 가끔 걸음을 멈춥니다. 멈춤은 포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숨 고르기이자, 다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멈춰 서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습니다. 내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빛, 바람에 실려오는 이름 모를 꽃향기, 사람들 사이의 웃음소리. 달려갈 때는 놓치던 것들이 걸음을 늦출 때 선명해집니다. 결국 삶은 얼마나 빨리 걷느냐가 아니라, 멈춰 선 순간 무엇을 보았느냐로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나는 길 위에 있습니다. 발끝에 전해지는 작은 진동은 나에게 말합니다.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고, 아직 걸을 길이 남아 있다고. 언젠가 이 걸음이 멈출 날이 오겠지만, 그때까지 나는 한 걸음씩 내딛을 겁니다. 결국 삶은 수많은 걸음의 합이며, 그 발자국 위에서 나는 나를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