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장| 그냥

말하지 못한 모든 이유의 자리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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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 제2악장 Allegretto – 고요히 흘러가듯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그냥이라는 말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단어일지 모른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모든 걸 덮어버리는 말. 누군가 “왜?”라고 물었을 때 “그냥.”이라고 대답하면, 더 이상 캐묻지 않는 법이다. 마치 문장을 끝내는 마침표처럼, 모든 의문을 무력하게 만드는 한 글자. 나는 그 단어 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을 숨겨왔던가.

어릴 적에도 그랬다. 울다가 어른이 다가와 “왜 울어?”라고 묻던 순간, 대답할 수 없어서 “그냥.”이라고 말한 기억. 사실은 서러움 때문이었고, 억울함 때문이었으며, 어쩌면 외로움 때문이었지만, 차마 다 말하기엔 어린 마음이 복잡해서. 그 한마디로 모든 걸 감췄다. “그냥”이라는 말은 그때부터 내 안에 작은 은신처처럼 자리 잡았다.

살아오며 이유는 늘 따라붙었다. 왜 공부를 못 했는지, 왜 친구와 싸웠는지, 왜 그와 헤어졌는지. 하지만 꼭 설명해야만 하는 걸까. 때로는 너무 복잡하고,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마음이 있어서 “그냥”이라고 얼버무렸다. 사실은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너무 많아한 문장에 담을 수 없어서였다. 그때마다 “그냥”은 방패가 되어줬다. 누군가는 성의 없다고 했지만, 나에겐 그것이 유일한 대답이었다.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좋아하냐는 물음 앞에서 나는 자꾸 머뭇거렸다. 잘 웃어서, 다정해서, 눈빛이 따뜻해서, 그런 이유들을 나열하다 보면 오히려 진심이 퇴색되는 듯했다. 그래서 결국 “그냥 좋아.”라고 말하는 게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 그 마음은 논리나 설명이 아니라 그저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는 거니까. 이유를 억지로 찾아내려는 순간, 순수한 감정은 형태를 잃고 말았다.

이별도 그렇다. 왜 헤어지냐는 질문 앞에 머리를 굴리며 갖가지 설명을 준비해도, 끝내는 한마디로 귀결된다. “그냥 안 맞아.” 서로 다른 하늘 아래, 다른 시간을 살아온 두 사람이 부딪히다 보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 그 멈춤의 순간은 수천 가지 원인이 있지만, 말로 꺼내면 다 초라해진다. 결국 “그냥”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이유가 된다.

인생을 돌아보면, “그냥”으로 넘긴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하고 싶어도 못 했던 일,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해야 했던 일, 다 잊고 싶은 일들. 설명할 길 없는 사소한 사건들이 쌓여 하나의 삶이 된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는 페이지들이 많아질수록 나는 점점 “그냥”이라는 말에 기대었다. 그것은 내 삶의 가장 두꺼운 표지이자, 쉽게 넘길 수 없는 장정 같은 것이었다.

가끔은 이 말이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는 “그냥 그랬어.”라고 말하면, 그 말은 이유를 지우는 칼날이 된다. 상대방은 받아들일 수 없는 허공 속에 내던져진다. 이해할 틈조차 주지 않는 냉정함. 그래서 나는 애써 설명을 늘어놓으려 하지만, 결국 말하지 못한 속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고, 끝내는 “그냥”이라고 흘려보낸다. 변명과 침묵 사이, 그 어중간한 다리 위에서 흔들리며.

세상이 자꾸 이유를 요구하는 게 피곤할 때가 있다. 왜 이 일을 하느냐, 왜 이 선택을 하느냐,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지만 삶의 많은 결정들은 이유가 아니라 순간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가끔은 이유 따위는 사치일 뿐, 그냥 그렇게 발걸음이 닿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 물이 흘러 바다로 향하듯, 내 삶도 그저 흘러와 지금에 닿았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벅찰 때가 있다. 굳이 행복하다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그냥 살아 있는 이 순간이 나를 붙든다. “그냥”이라는 말속에는 이렇게 단순한 기쁨도 숨어 있다. 이유 없는 웃음, 목적 없는 산책,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 그것들이 모여 삶을 지탱한다.

나는 가끔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쓰느냐고. 대단한 목표가 있어서도 아니고, 인정받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냥 쓰고 싶어서 쓴다.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것들을 가두지 못해, 흘려보내지 않으면 안 되어서. 단어들이 흩어져 나올 때야 비로소 내가 나인 것 같다. 글쓰기는 내게 ‘그냥’의 다른 얼굴이다.

사람들은 목적을 찾으려 애쓴다. 더 잘 살아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멀리 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가끔 생각한다. 꼭 그렇게까지 이유를 찾아야만 하는 걸까. 그냥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목적 없는 하루도, 이유 없는 선택도, 때로는 삶을 아름답게 채운다. 의도하지 않은 길모퉁이에서 만난 풍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처럼.

어쩌면 인생은 이유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큰 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강 위의 나뭇잎처럼,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어느샌가 바다에 닿는다. 그 과정에서 “왜?”라는 질문은 부질없다. 다만 “그냥”이라는 한마디가 그 모든 여정을 품는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더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살아 있다고. 왜 웃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고 싶어서라고. 왜 울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눈물이 흘러서라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긴 설명보다 솔직한 단순함이 때로는 더 진실하다.

나는 오늘도 이유를 다 말할 수 없어서, 혹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서, 이렇게 적는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