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장|기억

기억은 인간의 형벌이자 구원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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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참 편리하다. 필요할 땐 살려두고, 불리할 땐 지워버린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알리바이이자, 가장 오래된 변명이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이들도 결국 말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한마디면 끝이다. 감정도 책임도, 심지어 진실조차 증발한다. 기억이야말로 인간이 숨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은신처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일 앞에서는 유난히 기억력이 나빠진다. 청문회장에서도, 법정에서도, 뉴스의 마이크 앞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반복된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해도, 폭력을 휘둘러도, 거짓을 말해도 모두 똑같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하나의 방패처럼 사용된다. 마치 기억이 없으면 죄도 없다는 듯이. 기억 상실은 이제 기술이 아니라 습관이 되었다. 편리한 망각의 시대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보지 않기로 선택될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진실을 지운다. 마음이 아니라 이익이 기억을 결정한다. 기억의 절반은 늘 자기편을 든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은 언제나 진실보다 유리하다. 잊는 능력은 생존 기술이 되었고, 기억은 죄책감의 무게로 남는다.

그러나 잊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과거의 한복판에서 산다. 잊으려 해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장면, 한 문장, 한 표정. 그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시간보다 강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지나가지 않는다. 기억은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잊지 못하는 사람은 끝내 그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기억은 언제나 정의롭지 않다. 어떤 기억은 단 한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고, 어떤 기억은 하루 만에 흔적조차 사라진다. 누군가는 한 번의 웃음을 평생 품고, 누군가는 자신의 잘못을 평생 부정하며 산다. 기억의 선택권은 감정이 아니라 욕망이 쥐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리한 기억은 지우고, 유리한 기억만 남긴다. 기억은 양심보다 빠르고, 후회보다 영리하다.

기억은 권력이기도 하다.
누가 기억하고,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국가가 기억을 지우면 세대는 침묵으로 물들고,
시대가 망각을 선택하면 진실은 왜곡된다.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땐 몰랐다.”
하지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고도 외면한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책임을 거부하는 일이다.

기억은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고, 낯설어진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 줄의 노래, 오래된 냄새, 바람 한 조각에도 기억은 되살아난다.
그건 마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어느 날 불쑥 떠오르는 조각 같다.
아무리 깊이 묻어도 기억은 언젠가 돌아온다.
“나 아직 여기 있다”는 속삭임처럼.

기억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죄의식이다.
사랑했던 얼굴을 잊는 건 죄 같고, 잊지 못하는 건 벌 같다.
기억은 우리에게 상처이자 구속이다.
그 모순 속에서 인간은 매일 흔들린다.
기억은 결국 우리를 벌하고, 동시에 구원한다.
그 잔인한 이중성이 인간의 증거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잊어야 산다.”
하지만 잊는다는 건 살아온 흔적을 지우는 일이다.
기억을 버린 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기억은 아프지만, 그 아픔이 인간을 단단하게 만든다.
기억이 없는 삶은 망각의 낙원일지 몰라도,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다.

기억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
기억이 없으면 반성도 없다.
기억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기억이 없으면 다시는 변화도 없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건 기억과 함께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일이다.

어쩌면 기억은 인간이 스스로를 묶는 마지막 사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사슬을 끊으려 애쓰지만, 완전히 놓으면 자신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기억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 괴로움 덕분에 우리는 자신을 확인한다.
기억한다는 건 곧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기억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완전하기에 인간답다.
모든 걸 기억하는 존재는 신이지만,
모든 걸 잊는 존재는 괴물이다.
인간은 그 사이에 선다.
잊을 수도, 완전히 기억할 수도 없는 불완전한 존재.
그 불완전함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기억은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현재를 버티게 하는 일이다.
기억이 없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할 수 없다.
기억이란 결국, 우리가 다시는 같은 어둠 속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작은 등불이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꺼질 듯하지만, 그 빛 덕분에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다.

기억은 인간의 형벌이자 구원이다.
그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기억이야말로 우리를 괴롭히면서도 살아 있게 하는 가장 인간적인 능력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기억하며, 다시 하루를 견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