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며 남는다
추천 클래식
Claude Debussy – La fille aux cheveux de lin (The Girl with the Flaxen Hair, L.117 No.8)
모래밭엔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금세 사라진다. 마치 사랑처럼.
누군가의 온기를 품은 듯 반짝이다가도, 이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평평해진다. 나는 그 위를 걷는다. 바람이 발끝을 스치고, 파도는 내 걸음을 삼키듯 밀려왔다가 사라진다. 그 잠깐의 흔들림 속에서 세상은 잠시 멈춘다.
햇살이 수면 위를 흘러내려 모래를 비춘다. 수많은 알갱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빛난다. 서로 닮았지만, 어느 하나 같은 건 없다. 사람도 그렇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마음의 색은 모두 다르다. 바람 앞에서 부서지는 모래처럼, 우리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다.
나는 자주 모래밭을 떠올린다. 잊으려는 일들이, 이상하게도 그곳에 닿으면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파도에 젖은 모래처럼 마음도 잠시 눅눅해지고, 그 안에 묻었던 말들이 차츰 스며 나온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던 날에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을 떠올릴 때에도, 나는 늘 모래밭을 떠올렸다. 그곳은 이별을 삼키는 땅이다. 울음이 닿기 전 사라지는 곳, 말 대신 침묵이 더 잘 어울리는 곳.
모래는 붙잡을수록 흩어진다. 손안에 담으려 하면 금세 빠져나간다. 그래서 나는 손을 편다. 놓아야 비로소 남는 게 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꼭 쥐면 아프고, 놓으면 그제야 따뜻하다. 그 온기를 기억할 수 있다면, 사라지는 건 결코 비극이 아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가 일어선다. 무수한 알갱이들이 동시에 흔들리며 하늘로 피어오른다. 그 모습이 꼭 삶 같다.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흔들리고, 부딪치며 방향을 잃지만, 결국 어딘가로 흩어져 빛이 된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그런 일인지도 모른다. 단단히 버티는 대신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
어린 시절의 여름이 떠오른다. 나는 모래성을 쌓았다. 손끝으로 꼭 다져 올리던 그 시간은 마치 마법 같았다. 하지만 파도는 언제나 예고 없이 밀려왔다. 성은 무너지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잠시 울었다. 그러고는 다시 모래를 모았다. 이번엔 더 단단하게, 더 높이. 그래도 결과는 같았다. 파도는 늘 내 의지보다 빠르고, 바람은 내 마음보다 냉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반복이 싫지 않았다. 무너질 걸 알면서도 다시 쌓는 마음이 어쩐지 살아있다는 증거 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다 그런 존재일지 모른다. 부서지며 배우고, 잃으며 자라는. 완성보다 과정이, 머무름보다 흔들림이 우리를 만든다.
모래밭은 늘 낮은 곳에 있다. 파도가 밀려와도 견딜 수 있는 건, 자신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나는 그 겸손함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많은 것을 품는 모습이 닮고 싶다. 사람의 품도, 마음의 바닥도, 그렇게 부드러워지면 좋겠다.
햇빛이 강하게 쏟아질수록 모래는 뜨겁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금세 식는다. 그 안에는 변덕이 없다. 오직 ‘지금’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모래밭 위에서만큼은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의 숨결, 지금의 온도만이 있다. 모든 것은 순간이고, 순간이 곧 영원이라는 걸 그곳에서 배운다.
어느 날은 파도가 잔잔했고, 또 어느 날은 거칠었다. 그럼에도 모래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맞서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다만 품고, 흘려보냈다. 그 단순한 태도 속에 삶의 지혜가 숨어 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미워하지 않으려 애쓸 때, 나는 모래를 생각한다. 그건 포기가 아니라 수용이다. 받아들이되, 머물게 두지 않는 것.
나는 걷는다.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발끝이 닿을 때마다 모래는 내 체온을 삼킨다. 그리고 바로 사라진다. 마치 내 흔적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듯. 그러나 사라진다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단지 다른 형태로 남는다는 의미다. 기억 속, 공기 속, 혹은 누군가의 마음속. 그렇게 변하며 남는 것이다.
바람이 세어지고, 머리카락 사이로 모래가 파고든다. 눈을 감으면 그 작은 입자들이 속눈썹을 간질인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다. 오히려 다정하다. 삶이란, 이렇게 조금씩 묻어드는 것 아닐까. 어제의 상처가 오늘의 모래가 되어, 내 마음을 덮고 따뜻하게 감싸는 것.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모래밭에 앉아 손끝으로 선을 그었다. 이쪽은 어제, 저쪽은 오늘. 그러나 바람 한 줄기에 선은 사라졌다. 경계는 무의미했다. 결국 어제와 오늘, 그 사이에 있는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래일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완벽히 지워져도 괜찮은 마음. 그게 진짜 자유 같았다.
노을이 내리면 모래의 색이 변한다. 금빛에서 주황빛으로, 주황빛에서 잿빛으로. 모든 색은 사라지며 다른 색으로 이어진다. 삶도 그렇다. 끝이 곧 다른 시작이고, 사라짐은 새로운 형태의 존재다. 나는 그 진리를 모래밭에서 배웠다.
모래밭엔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걷는 동안 나는 살아 있었다.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쳤고, 파도가 내 마음을 닦아주었다. 그 짧은 순간이 영원 같았다. 남지 않아도 괜찮다. 잊혀도 괜찮다. 결국 사랑도, 삶도, 모래처럼 흩어져야 빛난다.
오늘도 나는 모래밭을 걷는다. 손끝에 닿는 따뜻한 입자들, 발목에 감기는 바람, 귀 끝에 스치는 파도의 숨결.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부드럽게 만든다. 언젠가 내가 완전히 흩어질 그날까지, 나는 이렇게 걷는다. 부서지며 살아가고, 사라지며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