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장|이해할 수 없는

사랑도, 어른도, 나도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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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us clavicembalisticum (Kaikhosru Shapurji Sorabji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세상.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자꾸 마음에 남는다.
머리로는 다 정리했다고 믿는데, 마음은 언제나 낙서를 남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논리로 정리되지 않는 관계가 있다.
그건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의 문제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
잘해준다고 했는데 상처가 되고, 아무 의도 없었는데 오해로 번지고,
마음을 줬는데 멀어지는 사람.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도 결국 삶이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게 삶의 모양이고, 어쩌면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다.

아이는 어른으로 살아본 적이 없기에 어른을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른은 자신도 아이였던 시절을 살아왔으면서도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어서일까?
아니면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어서일까.
자신이 이해받지 못했다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사랑받은 적 없다고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이 닫혀 있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를 모른 척하며 단단해진다.

어른은 자신이 어른이기에 살아온 인생이 있으니
그것이 마치 정답인 것처럼 굴고, 아이들에게 이해를 요구한다.
아니, 강요한다.
“내가 다 겪어봤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그 말속엔 사랑보다 통제가 많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월권을 취하고,
아이의 세계를 엿보지도 않은 채,
‘널 위한다’는 이름으로 이해를 강요한다.
아이의 울음은 떼쓰기로 치부되고,
아이의 분노는 철없다고 단정된다.
그러나 그 모든 판단의 밑바닥엔
‘나는 틀릴 리 없다’는 확신이 숨어 있다.
그 확신이 아이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어른은 잊었다.
자신도 한때, 울음으로 세상을 배웠다는 걸.
이해받지 못해 울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순간, 마음은 자란다기보다 굳어버린다.
아이를 가르친다는 명목 아래, 어른은 자신을 증명하려 든다.
그렇게 세대는 단절되고, 대화는 싸움이 된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사실 편한 변명이다.
그 말 뒤에 숨으면 되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듯 보이고, 책임도 사라진다.
“나는 이해가 안 돼.”
그 말은 벽이 된다.
하지만 이해는 벽을 세우는 게 아니라 문을 여는 일이다.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서, 안이 어떤지 어찌 알겠는가.

나는 그런 어른이 되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도 종종,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이해받지 못한 기억이 많을수록,
나도 누군가를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된다.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많을수록,
나도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잊는다.
결국 상처는 대물림 된다.
이해받지 못한 어른이, 이해하지 않는 어른이 된다.

사람은 각자의 언어로 살아간다.
같은 단어를 써도 뜻이 다르고,
같은 감정을 느껴도 색이 다르다.
“괜찮아.”라는 말조차 누군가에겐 위로고,
누군가에겐 단념의 신호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엇갈린다.
이해한다는 말은 결국 착각일지도 모른다.
진짜 이해는, 말이 아니라 침묵에서 시작된다.
묵묵히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진짜 이해의 형태다.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
사람은 너무 쉽게 판단한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나 때는 말이야.”
그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어떻게 찢는지 모른 채.
사람은 자신이 아는 세계만큼만 타인을 재단한다.
그리고 모르는 세계 앞에서는 침묵 대신 비웃음을 택한다.
그 비웃음이 관계를 끊고, 마음을 병들게 한다.

나는 이제야 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 뒤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는 걸.
상대의 마음을 마주할 용기보다,
그 마음을 해석하지 못할 불안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면하고, 포기하고,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사실 ‘다치기 싫다’는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진짜 이해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나와 다른 마음을 인정하는 용기.
그 다름이 불편해도, 여전히 곁에 머무는 용기.
그건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일이다.
사랑은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사랑은,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깊어진다.
그게 인간의 관계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있다.
죽음, 이별, 침묵, 후회.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이해할 수 없기에 묻고,
묻기에 또 한 걸음 나아간다.
모른다는 건,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걸 알아버리면 인생은 멈춘다.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나일로 데려간다.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살아간다.
때로는 내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이제는 두렵지 않다.
이해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고,
납득되지 않아도 곁에 있을 수 있다.
그게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완벽히 이해된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모호함과 오해 속에서만 진짜 이야기가 자란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문장을 품고 살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세상은 여전히 낯설고, 사람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 낯섦과 어려움이 바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닫히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야말로
세상을, 사람을, 그리고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