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대로 만든 인생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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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먼저 면부터 삶아야지. 한 7분 정도가 알맞더라.
냄비 속에서 면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김이 부엌 천장으로 올라갔다. 삶는 동안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베이컨 한 줄, 우유 한 팩, 고추장 한 통. 늘 그렇듯 오늘도 대충, 감으로, 손이 가는 대로 꺼냈다. 요리사들도 파스타에 고추장을 넣는다는데, 나라고 못 넣을 이유가 있을까. 누가 뭐래도 내 입맛이 기준이다.
프라이팬을 달구자 기름이 찌르르 튀었다. 베이컨을 슥슥 썰어 넣자 기름이 번들거리며 소리가 났다. 그 향이 제법 괜찮았다. 나는 고추장을 한 스푼, 케첩을 세 스푼 넣었다. 달콤한 냄새와 매운 냄새가 얽혀 올라왔다. 순간, 프라이팬 속 붉은색이 살아났다. 불 앞에 서서 그걸 바라보는데 마치 감정 하나가 불붙은 듯했다. 오늘의 하루가 주황빛으로 타오르는 기분.
그 위에 우유 200ml를 부었다. 처음엔 너무 묽어서 망한 줄 알았다. 하지만 불이 오를수록, 색이 점점 변했다. 붉은빛이 흰빛을 만나 서서히 주황으로 물들었다. 마치 해 질 녘의 하늘을 프라이팬 안에 담은 듯. 거품이 피어오르며 소스가 걸쭉해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고추장과 우유가 싸우다 화해하는 듯한 향이 났다. 매움과 부드러움이 서로를 덮어주는 냄새. 인생이란 것도 결국 이렇지 않나. 처음엔 다 뜨겁고 자극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유처럼 부드러워진다.
소금 한 꼬집, 후추 톡톡. 면을 넣고 휘휘 저었다. 주황빛 소스가 면을 감싸며 반짝였다. 치즈 한 줌을 넣자, 프라이팬 속에서 실처럼 녹아내렸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라는 걸. 치즈가 녹으며 내쉬는 부드러운 숨소리가 들렸다. 그 냄새가 부엌을 가득 메웠다. 나는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맛을 봤다. ‘어라?’ 생각보다 맛있었다. 아니, 진심으로 맛있었다. 내가 했지만, 맛있었다.
고추장의 매운맛이 혀끝을 간질였다. 케첩의 단맛이 그 뒤를 받치고, 우유가 모든 걸 감싸 안았다. 마치 다투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처럼. 매운 감정이 누그러지고, 단맛이 여유를 만들었다. 뜨거웠던 순간이 부드럽게 녹았다. 요리 한 그릇에 인생이 들어 있었다. 혼자 살아오며 배운 건 딱 하나였다. 레시피보다 중요한 건 ‘느낌’이라는 것. 정해진 답 없이 손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는 게 결국 제일 맛있다.
“요리사들도 고추장 넣지 않나? 아마도?” 스스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레시피를 어겨도 괜찮다고. 세상은 늘 정답을 강요하지만, 맛은 자유로울 때 더 깊어진다. 오늘의 파스타가 그랬다. 규칙을 벗어나자 비로소 진짜 맛이 났다. 인생도 그렇다. 틀을 깨야 비로소 자신만의 맛이 나온다.
식탁에 앉아 젓가락으로 한입, 또 한입. 파스타가 입안에서 미끄러졌다. 매콤한 향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순간,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별거 아닌 한 끼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행복하지? 요리라는 건 결국 자기 위로다. 누군가를 위한 밥상이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 불 앞에 서서 마음이 조금씩 정리된다. 그릇 위에서 삶이 끓고, 나는 그 냄새로 하루를 달랜다.
한참 후, 식탁 위엔 프라이팬 자국이 남았다. 고추장이 살짝 눌어붙은 자리가 보였다. 그게 왠지 자랑스러웠다. 완벽하게 깨끗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 흔적이 바로 내가 이 하루를 살아냈다는 증거니까. 세상은 결과만 본다지만, 나는 과정의 냄새를 더 믿는다. 불 앞에서 흘린 시간, 수저로 떠본 맛, 손끝에 남은 온기. 그것들이 나를 만든다.
나는 마지막 한입을 떠먹으며 생각했다. 이건 그냥 파스타가 아니다. 즉흥의 기록이자, 내 감정의 조리법이다. 매운맛과 단맛이 섞인 이 복잡한 조화가 꼭 사람 같다. 다채롭고 불완전하지만 결국 어딘가 따뜻하다. 케첩의 산미는 설레는 시작 같고, 우유의 부드러움은 오래된 관계의 온도 같다. 그리고 고추장은, 불타는 감정의 첫 장면. 그렇게 세 가지 맛이 내 하루를 요리했다.
누군가에겐 생계고, 누군가에겐 예술이겠지만, 나에게 요리는 일기다. 재료로 감정을 적는 방식. 오늘의 기분은 ‘괜찮음’이었다. 아니, ‘생각보다 맛있음’이었다. 진심으로. 내가 했지만 맛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손길로 만들어낸 한 그릇이 이렇게 따뜻할 줄이야. 그 부드러운 주황빛 소스가 마음속 허기를 덮었다.
치즈가 마지막까지 녹으며 ‘치이익’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치즈로 마무으리.” 그 말이 마치 주문 같았다. 허기와 하루, 그리고 나 자신에게 내리는 작은 포상.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추장 로제파스타. 우연히 만들었지만,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완벽했다. 맛이 아니라 마음이 완성된 요리였다.
불을 끄고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주황빛 자국이 반짝이며 나를 붙잡았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두기로 했다. 그 흔적이 좋아서. 그릇을 비운 자리엔 여운이 남았다. 여운은 냄새가 되어 부엌을 맴돌았다. 고추장의 향, 우유의 향, 베이컨의 향이 섞여 부드럽게 흘렀다.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인생도 결국 이렇다. 정답보다 감각, 계획보다 순간. 그리고 가끔은 즉흥이 더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