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납부 완료
추천 클래식.
Ludovico Einaudi – “Experience”
사는 게 이렇게 팍팍한데, 인생 고지서라니.
이건 또 무슨 청구서란 말인가.
전기세, 가스비, 카드값, 보험료도 벅찬데,
이젠 인생 값까지 내야 한단다.
언제부터 살면서 ‘삶세(生稅)’가 붙은 걸까.
매달 통장은 말라가고,
급여일보다 빠른 건 카드 결제일뿐이다.
돈은 들어오기도 전에 사라지고,
남는 건 공허한 잔액과 깊은 한숨 한 줄.
그럴 때마다 문득 든다.
이 현실이 바로 인생 고지서가 아닐까.
모아도 모이지 않고,
채워도 자꾸 새어 나간다.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그릇.
내가 열심히 사는 이유는 단지 연체되지 않기 위해서다.
삶이 나에게 보내는 고지서는 잔혹하게도 자동 갱신된다.
연체료는 ‘불안’, 납부기한은 ‘오늘’.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인생 고지서란 말, ‘인생 고증’을 잘못 쓴 건 아닐까?
이 벅찬 현실을 증명하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세상이 일부러 엿 먹이려는 장난이었을까.
“그래, 네가 사는 인생. 이게 다 청구서야.”
그런 비아냥이 들리는 것만 같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라야 고정 월급이라는 게 있으니
그래도 걱정이 덜하겠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숫자가 찍히니까.
하지만 난… 직장인은 아니란 말이지.
그럼 뭐냐고?
알고 싶어?
근데 난 말 안 할래.
심술이 나서, 그냥 말하기 싫어졌어.
돈 얘기만 나오면 마음이 더 좁아지는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말할래.
“나는 매달 정해진 돈은 없지만, 대신 정해진 감정도 없어.”
누군가는 같은 길로 출근하지만
나는 매일이 다르고, 그래서 늘 불안하고, 그만큼 자유롭다.
이게 축복인지 형벌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떤 날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 뿌듯하다가도,
어떤 날은 통장 잔고를 보고 허탈하게 웃는다.
‘내가 이걸 왜 시작했지?’
그럴 때면 인생이 건네는 청구서 한 장이 떠오른다.
직장인은 돈으로 납부하지만,
나는 감정으로 낸다.
불안으로, 초조로, 후회로, 그리고 가끔은 자존심으로.
그게 내가 매달 내는 인생세(人生稅)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납부한다.
한숨으로, 커피 한 잔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내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영수증이다.
살다 보면 어느 날, 고지서의 항목이 달라진다.
어릴 땐 성적표가,
청춘엔 이별이,
어른이 되고 나선 세금이 인생의 고지서가 된다.
나이 들수록 항목은 늘어나고,
명세서는 길어진다.
책임, 건강, 관계, 노후, 불안.
납부 금액은 점점 커지고,
잔고는 점점 얇아진다.
행복마저도 할부로 사야 하는 세상.
커피 한 잔의 여유조차도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
어쩌다 이렇게까지 비싸진 걸까.
나는 단지 숨을 쉬었을 뿐인데,
삶은 언제나 청구서를 내민다.
그래도 때로는 환급이 있다.
뜻밖의 위로, 아무 일 없는 평화,
그리고 문득 들리는 친구의 안부 인사한 줄.
그건 인생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조용한 리워드다.
나는 그 환급이 너무 귀해서
가끔 메모장에 적어둔다.
“오늘은 커피가 유난히 맛있었다.”
“버스에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퇴근길 하늘이 이상하리만큼 예뻤다.”
별거 아닌 하루가, 인생의 보너스로 바뀌는 순간이다.
사람마다 내는 세금이 다르듯,
인생 고지서도 다르다.
누군가는 사랑으로,
누군가는 외로움으로,
누군가는 병으로 지불한다.
그러나 모든 이가 공통으로 내는 항목이 있다.
‘시간’이다.
시간은 매일같이 청구된다.
기한은 매번 ‘지금’.
남길 수도, 미룰 수도, 할부도 불가능하다.
그저 오늘이라는 순간을 대가로 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후회 없는 지출’을 하려고 한다.
억지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의미 없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절세다.
어쩌면 인생의 고지서는 벌이 아닐지도 모른다.
청구가 계속 온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누군가에겐 더 이상 고지서가 오지 않는다.
삶이 끝났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연체라도 좋으니 청구가 오는 편이 낫다.
물론 여전히 짜증 날 때가 많다.
가끔은 통장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야, 인생아. 이번 달은 좀 봐주면 안 되겠니?”
하지만 인생은 묵묵히 새 고지서를 내민다.
“살았으니, 살아내야지.”
나는 그 종이를 구기지 않는다.
대신 그 위에 낙서를 한다.
오늘의 기분, 흘러간 생각,
그리고 언젠가 갚아야 할 꿈.
그렇게 나만의 영수증이 한 장씩 쌓인다.
이쯤 되면 고지서도 고맙다.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내 이름으로 발행된 인생의 기록이니까.
누가 뭐래도 나는 아직 납부 중이다.
오늘도, 내일도, 아마 그다음 날도.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버티고 있다.
나는 매일 인생 고지서를 열어본다.
한숨이 먼저 새어 나오지만,
그 위에 이렇게 써넣는다.
‘오늘도 납부 완료.’
그리고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한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내 인생의 잔고에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잔액이 남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