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넣지 못한 마음 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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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vo Pärt – Spiegel im Spiegel
(‘거울 속의 거울’이라는 뜻 자체가 “닮아가는 모녀”의 상징 그 자체)
오이를 방치한 건 엄마였다. 냉장고 바로 옆에 두고도 넣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진 않았다. 나도 그런 날이 있으니까.
마트에서 두 봉이나 사 오더니 식탁 한편에 그대로 두셨다. “이따 무침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날 저녁엔 피곤하다며 눕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대로였다.
나는 그 오이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손등을 스쳤다.
엄마가 깜빡 잊은 일을 대신해주는 게 요즘의 내 몫이 되었다.
예전엔 내가 늘 잊어버리곤 했는데, 세상은 참 조용히 자리를 바꾼다.
싱크대 위에는 장바구니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고,
그 안엔 비닐도 벗기지 않은 채 오이들이 누워 있었다.
봉지를 뜯으며 잠시 멈췄다.
엄마가 오이를 이렇게 방치한 게 낯설었다.
늘 냉장고 속을 반짝이게 정리하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이런 게 잦아졌다.
약을 놓치고, 택배를 주문해 놓고 잊어버리고, 반찬을 만들다 재료를 태우기도 한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쿡 하고 저린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도 다르지 않다.
오이를 냉장고에 넣는 걸 미루고, 해야 할 전화를 다음날로 미루고,
마음속에 쌓인 일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하루를 넘긴다.
나도, 엄마도 그렇게 조금씩 잊는다.
물론 너무 자주는 아니다.
그럴 때면 괜히 웃음이 난다.
닮았다는 건 결국 서로를 이해한다는 뜻이니까.
냉장고에 오이를 넣으며 생각했다.
이젠 내가 엄마의 시간을 챙겨야 하는구나.
그 단순한 동작이 묘하게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냉장고 문을 닫자 차가운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그 속에는 내가 몰래 눌러 담은 마음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예전엔 늘 부지런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식탁 위엔 이미 오이무침이 있었다.
고춧가루가 묻은 오이의 초록빛이 유난히 선명했고,
참기름 냄새가 부엌을 감쌌다.
엄마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이는 단단할수록 맛있어. 너무 오래 두면 물러져.”
그 말이 단지 반찬 얘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마음의 이야기였다는 걸.
상하지 않게,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그것이 삶을 버무리는 법이었다.
며칠 뒤, 냉장고 안에서 오이를 꺼냈다.
비닐 안쪽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손끝으로 만지자 오이가 약간 부드러워져 있었다.
겉은 여전히 초록빛인데 속은 달라졌다.
사람도 그렇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은 조금씩 물러간다.
나는 그 변화를 보며 마음 한쪽이 눅눅해졌다.
칼을 들어 오이를 썰었다.
‘탁’ 소리가 날 때마다 묘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엄마가 잊은 오이를 대신 썰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슬펐다.
그 소리는 나무도 아니고 물도 아닌,
딱 그 중간의 소리였다.
살짝 젖은 마음을 자르는 듯했다.
식탁에 그릇을 올려놓자 엄마가 말했다.
“이거 네가 한 거야?”
“응. 냉장고에 있길래.”
엄마는 한입 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맛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감정이 겹쳐 있었다.
고마움, 미안함, 그리고 세월의 짠맛 같은 것.
나는 그때 알았다.
돌봄이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냉장고 문을 닫아주는 일,
오이를 썰어 양념을 묻히는 일,
그런 사소한 반복이 결국 가족을 지탱한다는 걸.
어릴 땐 엄마가 내 도시락을 챙기고,
내가 잊어버린 숙제를 찾아주고,
내 대신 냉장고 문을 닫아주었다.
지금은 내가 엄마의 부엌을 살피고,
엄마가 두고 간 시간을 챙긴다.
시간은 그렇게 방향을 바꾼다.
돌봄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천천히 옮겨가는 강 같다.
나는 그 강의 하류에서 물을 받는 사람이다.
물은 식지만,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다.
냉장고는 이상한 공간이다.
그 안에서는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흐른다.
오이는 그 안에서 천천히 늙는다.
마치 엄마의 얼굴처럼.
나는 자주 냉장고 문을 괜히 연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된다.
그 안에는 내가 넣어둔 오이와,
엄마의 미루어진 하루가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저녁이 되어 오이무침을 상에 올렸다.
엄마는 젓가락을 들다 말고 말했다.
“너무 차갑게 하지 말지 그랬어.”
나는 웃었다.
“엄마가 안 넣길래 내가 대신 넣었잖아.”
그 말에 엄마도 웃었다.
잠시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그 웃음은 오래전 내가 밥투정하던 시절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의 미소엔 뿌리가 있다.
식탁 위엔 두 봉지 중 한 봉의 오이가 남아 있었다.
내일쯤 먹을 수 있을까 싶다가도,
그냥 두면 또 잊어버릴지도 몰랐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한 번 더 손등을 스쳤다.
그 순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내가 냉장고 문을 닫는 동안,
세상 어딘가에서 엄마는 잠이 들고 있을 것이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는
나의 손길과 엄마의 시간이 함께 닿아 있었다.
돌아보면 인생의 많은 일들이 오이와 닮았다.
너무 오래 두면 상하고, 너무 서두르면 맛이 없다.
적당한 때, 적당한 온도, 적당한 손길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사랑의 모양일지도 모른다.
오이를 방치한 건 엄마였지만,
냉장고에 넣은 건 나였다.
그리고 잊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이어진다.
돌봄이 방향을 바꿀 때,
닮음이 시작될 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오이의 숨, 그리고 우리 모녀의 하루가 조용히 식탁 위에 머물렀다.
냉장고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오늘도 잊지 말아야 할 마음 하나쯤은, 꼭 넣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