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멈춘 듯한 오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마음은 늘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래서였을까. 오늘도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로 바람이 살짝 스치며 커튼을 밀어 올렸다. 흰 천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그 짧은 움직임이, 마치 세상이 느리게 숨 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리듬에 맞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늘 잔잔한 듯 흔들린다. 생각을 멈추려 할수록, 생각은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결국 나는 멍하니 앉아 있는 척하며, 내 안의 혼잡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런 시간이 필요해졌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끝도 없이 늘어나는 하루 속에서, 손끝 하나 움직이기조차 싫은 날이 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순간. 멍하니 앉아 있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세상이 쉴 새 없이 달려가라 재촉할 때, 나는 잠시 멈춰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숨을 고른다.
예전엔 이런 나를 한심하게 여겼다. 친구들은 열심히 살았고, SNS 속 사람들은 언제나 분주했다. ‘나만 이렇게 멍하니 있어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멍하니 있는 나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진짜 나였다. 일과 목표, 성취와 비교로 덮인 껍질 아래에서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멍한 그 시간이야말로 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끔 멍하니 앉아 있으면 묘한 일들이 일어난다. 생각이 흘러가고,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봄날 벚꽃이 흩날리던 길에서 함께 웃던 얼굴이 떠오르고,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따뜻해졌다가도 갑자기 허전해진다. 그리움은 언제나 불쑥 찾아와 마음 한쪽을 두드린다. 그래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리움을 밀어내기보다, 조용히 받아들인다.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나의 과거를 끌어안는다.
식어버린 커피잔을 앞에 두고, 방 안에 고요가 퍼진다. 벽시계 초침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지만, 내게는 시간이 멈춘 듯하다. 그 느린 흐름 속에서 마음의 잡음이 사라진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가라앉고, 대신 아주 작은 평온이 스며든다. 그것은 누군가의 위로보다도 더 따뜻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본 게 언제였던가. 요즘은 쉬는 것도 눈치가 필요한 시대다. ‘멈춤’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멍한 시간은 삶의 틈새다. 그 틈이 있어야 공기가 들어오고, 그 공기가 있어야 다시 숨을 쉰다.
멍하니 있을 때면 문득,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이 찾아온다. 누구나 한 번쯤 던져보지만,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묻어두는 질문.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멍하니 앉은 채로 그 질문을 다시 꺼내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답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가볍게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그제야 진심으로 와닿았다.
노을이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세상의 소음이 모두 사라진 듯하다. 붉은빛이 천천히 번지고,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는 그 짧은 찰나. 그때 나는 깨닫는다. 멍하니 있는 것도 삶의 일부라는 걸. 생각의 쉼표이자, 마음의 숨구멍 같은 시간. 그 시간이 있어야 내일의 문장들이 다시 써진다.
과거의 나는 ‘멍하니 있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들었다. 허송세월 같고, 무의미한 낭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멍한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나를 회복시키는 가장 인간적인 숨결이다. 세상이 쉴 새 없이 요구하는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돌아가는 일. 그 단순한 행위 안에 위로가 숨어 있다.
멍하니 앉아 있는 건 마음의 침전 과정 같다. 흙탕물이 가라앉듯, 복잡한 감정들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앉는다. 그 위로는 맑은 투명함이 남는다. 그 맑음 속에서 나는 다시 세상을 본다. 조금은 다르게, 조금은 부드럽게.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의 시선이 달라진다.
창문을 살짝 열면 바람이 스며든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낙엽 몇 장이 바닥을 스친다. 그 소리가 마음에 닿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순간. 세상은 늘 그렇게 조용한 방식으로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여전히 멍하니 앉아 있지만, 그 속에서 나의 세계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멈춘 듯하지만, 내 안의 어떤 것이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다.
세상이 멈춘 듯한 오후, 나는 나를 다시 느낀다. 멍한 그 시간은 공허가 아니라 여백이었다. 그 여백이 있어야 새로운 감정이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에도, 삶은 내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멍하니 앉는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세상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멍한 시간은 나를 잃지 않게 해주는 가장 조용한 싸움이다.
그 싸움이 끝나면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무거웠던 어깨를 펴고, 깊은숨을 내쉬며,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 시간은 결국, 다시 시작하기 위한 힘을 길러주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나는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바라본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손등에 닿고, 식은 커피의 향이 공기 속에 퍼진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 고요한 순간이 내 하루를 채워주는 걸 느낀다. 멍하니 앉아 있는 지금, 나는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세상이 몰라도, 나는 나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 평온 속에서, 아주 천천히, 다시 살아간다.